말귀를 도통 못 알아먹는 고집불통 며느리!

딸 같은 며느리 10

by 정루시아



2001년 가을 박사과정 시험을 봤다. 머리가 뻑뻑했다. 만 35살의 나이가 어리지 않으니 말이다. 시간강사 수입으로 오피스텔 임대료를 내고, 패턴 개인 강습료로 아들 돌봄 아주머니 비용을 내며, 박사과정을 들어간다 하니 시어머니는 "그냥 강의와 패턴 개인지도로 살살 용돈을 벌며, 애나 보면 되지 무슨 박사과정인가?" 했다. "널린 게 박사고 널린 게 보따리 강사라는데 너도 고생이지만 애들과 남편이 또 고생하겠구나." 하며 탄식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후 시어머니는 우리집에 주 2~3일 이상 계시며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남편이 당직 조정을 했지만 이삼일은 저녁시간 얘들을 챙겨줘야했기에 어머님은 먼길을 마다않고 천안에서 대전까지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오셨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시며 석사학위를 힘겹게 따신 시아버지도 "대학에 널린 게 보따리 강사인데 힘든 박사학위를 따서 뭐하려느냐."며 탐탁지 않아하셨다. 교직에 있는 많은 선생님들이 석사도 하고 박사도 따며 경력관리와 평점관리를 하던 때이니 대학에는 석, 박사 과정이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시부모님 걱정이 지당했다. 당시 대학은 박사들을 수없이 배출했고, 교양과 전공강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던 시절이라 강사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교수 자리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격이어서, 강사들, 박사과정 학생들 사이에선 대학교수 자리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돌았고, 몇억을 기부하고 학교에 들어갔네 하는 등 확인할 수 없는 말들이 나돌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시부모님이 박사과정 입학을 곱게 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남편은 "일반 직장생활보다는 그래도 대학 강의와 미래 가능성에 투자(교수 자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시부모님을 설득했다. 시부모님은 "방학엔 급여도 없고 강의란 것도 지도교수가 주는 것이니 뭐하나 확정된 것 없는 일에 괜히 애만 쓰고, 돈만 쓰고, 애들만 고생한다." 생각하며 내켜하시지 않았다. 얘들이 감기가 들거나 냉장고 반찬이 부실하면 시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보따리 강사 하느라 애쓰니 참! 너도 애들도 고생이구나!"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박사과정 중 실험실에서 나오는 연구보조비와 2, 3과목 강의하던 터라 박사과정 수업료와 생활비는 내가 감당했지만 시부모님은 대학강사를 "보따리 강사"라 하셨다. 난 언제나 멀쩡한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보따리라니... 직장생활이 100미터 달리기라면 박사과정은 한증막에서 달리는 100미터 경주 같았다. 아침 7시 어학원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8시 실험실에 가서 가벼운 화장을 한 후, 실험실 생활을 시작해 저녁 5시에 차로 10분 걸리는 집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챙겨 아이들과 시어머니와 식사를 한 후 저녁 8시경 실험실로 돌아와 새벽 1시경까지 연구노트 정리, 연구논문 작성, 학회 발표 준비, 실험 준비, 강의 준비 등을 했으니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싶다. 영어공부를 위해 새벽에 나가는 내게 시어머니는 "아이고 힘들어서 어쩌니." 하면서도 "콩 조리와 멸치볶음, 아이들이 잘 먹는 오징어 볶음이 떨어졌다." 하셨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 반찬은 애들이 먹지 않으니 언제나 밥상 책임은 내게 밀려오고 철 따라 김치를 담그고 나물을 무쳤다.


박사논문 인쇄를 맡기고 집에서 머무르던 2006년 2월 시어머니가 물었다. "이제 뭘 할 예정이니? 대학에 자리가 나겠니? 힘들게 공부해도 널린 게 박사고 널린 게 보따리 강사인데." 했다. 내가 "어머니, 박사 후 과정에 가려고요." 하니, "그건 뭐냐? 박사면 끝난 게 아니냐? 박사 후 과정이 또 있냐?" 하며 놀란 눈으로 묻던 시어머니가 생각난다. "네~ 월급 받으며 연구하는 과정이에요." 했다. "의류학과 박사가 연구소에도 갈 수 있냐?" 시어머니는 궁금해하셨다. "네, 아마 제가 처음일 듯한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는 말이죠. 받아준다는 팀이 있어서 조만간 갈 것 같아요." 했다. 그때 시어머니는 정말 신기해하셨다. 이름난 연구원에서 옷 만들던 며느리가 일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딱 일 개월 쉬고 박사 후 과정을 밟았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의류학과 출신 박사 후 과정을 받아주었으니 아쉽다면 너무 짧게(6개월 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연구했다는 사실이다.


박사 후 과정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유헬스케어팀에 들어가 심전도 의복을 만들 때, 내가 제작한 심전도 측정 의복(유헬스케어팀이 개발한 심전도 측정 모듈을 장착한 의복)을 시범적으로 입고 테스트를 할 때 팀원 전체가 정말 희귀한 자료를 얻었다 좋아했었다. 측정된 데이터는 너무도 선명한 나의 부정맥 데이터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막 개발 중이던 의복 밀착형 심전도 센서는 내게 '그냥 얼른 집에 가서 쉬라.' 경고를 보냈지만 팀원들은 "유헬스케어 의복의 당위성을, 존재 근거를 얻었다."며 저녁 회식을 했다. 박사과정의 스트레스와 박사 후 과정의 녹녹지 않는 일과들이 이제는 좀 쉬라는, 심장의 외침이었으니 참 슬픈 추억이었다.


박사논문을 한참 쓸 때 남편은 "심한 스트레스에 과로가 겹쳐 부정맥이 심하니 좀 쉬라." 했다. '한 학기를 쉬면 이리저리 하다 일 년이 밀리니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를 하루라도 빨리 마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최선.'이라 생각했다. 밀라노를 다녀온 후 영어보다 이태리어가 입에 붙어 영어공부를 더 해야 했다. 그 덕에 지금 있는 대학(그 당시 우리 대학은 교수 지원자가 영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유일한 대학이었다.)에 들어왔으니 이런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없다. 100점 만점 시험에 2006년에만 리슨닝(Listening)이 50점(50문제)이었고, 한참을 들어 한 문제를 풀었는데,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고 들리는 데로 찍어, 함께 서류심사를 통과한 6명의 지원자 중 나만 통과했으니 말이다.


5월 초 시부모님이 군산 집에 놀러 오셨다. 팔십이 넘은 시어머니와 손을 잡고 정원 꽃들을 보며, 봄꽃에서 여름꽃으로 바뀌는 정원에 앉아 한참 꽃 얘기를 했다. 그때 내 속에 감춰진 지난 간 시부모님 말들이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왜 시부모님은 당신들도 기억 못 할 말들로 내게 상처를 주셨을까?' 하고 말이다. 지금은 이리도 편하게 웃으며 계절를 얘기하고 '가족의 행복과 일상을 얘기' 하시는데 말이다. 난 늘 나 자신의 도전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그분들은 지나가는 말로 내 도전을 믿을 수 없이 험난한 도전으로 밀어붙였으니 말이다. "널린 게 박사고 널린 게 보따리 강사라는데 너도 고생이지만 애들과 남편이 또 고생하겠구나." 하시던 시어머니의 말씀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말로 표할 수 없는 큰 슬픔과 두려움, 조바심을 불러일으켰음을 그분들이 상상이나 하였을까 싶다.


글을 쓰며 슬픔이 밀려왔다. 시부모님의 그런 말에 '나는 왜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제대로 된 대답 한번 못했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하고 말이다. 이 글을 '작가의 서랍'에 넣어놓고 몇 주를 생각했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를! 잠자는 시간이 적고, 하는 일이 많고, 늘 너무 분주했던 나를 걱정하셨었다. 그리곤 그런 나를, 그런 나만 바라보던, 엄마를 그리워하던 두 아이들을 걱정하였던 것을 이제서 글을 쓰며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말속에 늘 내 걱정이 숨어있고 아이들 걱정, 남편 걱정이 따라붙었는데, 나는 내 걱정은 지우개로 지운 듯, 가위로 잘라내곤 아이들 걱정, 남편 걱정의 소리로만 들었다. 안 해도 될 잔소리로, 딸 같은 며느리에게 타박하는 소리로만 들었었다.


딸 같은 며느리 시리즈에 들어가며 내가 겁쟁이였음을 미리 말해두었는데 정말 겁쟁이였음을 알게 됐다. 나는 겁쟁이에 더불어 말귀를 도통 못 알아먹는 고집불통 며느리였던 것을 말이다. '무엇이 그리 무서워 생각을 말하지 못했을까? 무슨 생각에, 무슨 마음에 자물쇠처럼 입과 맘을 닫고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어머니, 너무 힘들어서 반찬은 그냥 가게에서 살려고요. 열무김치는 김치가게에서 구매할래요. 피곤해서 토요일엔 늦잠 좀 잘게요. 어머니 제가 너무 피곤하니 오늘 저녁은 나가서 사 먹어요. 맛난 것 사드릴게요." 그렇게 말해도 됐는데 '왜 그 쉬운 말도 못 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 말한다 한들 "안된다, 네가 다 해야 한다." 고 모질게 대하실 분도 아닌데 '그런 말을 못 하고 나 혼자 들들 볶았을까?' 하고 말이다.


아이 돌봄의 사회적 책임이 채 자리도 잡지 않은 시절이었다. 시부모님은 은퇴 후 여생을 편히 쉬고 싶던 시절, 손주를 돌봐야 하는 고단함을 등에 지었으니 힘든 마음이 턱 던져진 것일 뿐인데 말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어 내 아이들을 그분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으니 누구를 탓하기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던 때였다. 육아시설, 돌봄시설이 도로망처럼, 수많은 기지국처럼, 너무 당연한 수도시설, 전기시설처럼 사회 곳곳에 자연스레 있지 않았으니 모든 아이, 부모, 조부모가 전전긍긍하며 살던 시절이었고 아직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딸 결혼식이 연기됐다. 딸은 전화를 걸어 "결혼식은 연기됐지만 법적 결혼을 하겠다며 혼인신고를 했다." 전했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와 고3아들(코로나19바이러스로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학교 갈 날만 기다리는 귀여운 아들)은 와인과 음료수를 마시며 딸 결혼을 축하했다.


어느 인생에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이 없겠는가? 어느 인생에 행복만 가득하겠는가? 고통과 슬픔이 있기에 행복이 빛나며, 행복이 있기에 고통을 참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예쁜 딸이, 순하고 착하며, 인내로는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는 나의 딸이, 그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낼 말이 없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딸이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은 겁내지 말고 조간 조간 자신의 생각을 오해 없이 말했으면 한다. 엄마를 닮아 겁쟁이에 입을 꽉 다문 고집불통 인간이 되지 않기를 바랜다. 진정한 가족은 듣기 싫은 말을 하기도, 듣기도 하는 관계임을 이리 나이가 들어 깨닫게 되어 "겁쟁이에 고집불통 엄마인 나를 닮지 말라." 사랑하는 딸에게 권할 뿐이다.


이전 10화사부인, 쟤가 씀씀이가 헤퍼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