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막걸리 마시다 부부싸움(1)

남편의 세계 11: 상대적 행복? 절대적 행복?

by 정루시아

둘째가 여덟 살 즈음이었을까? 거실에 TV가 있으니 저녁나절 가족이 TV 앞에만 모여 있어 어머님이 천안으로 올라가신 후 TV안방으로 옮겼다. 위치를 바꾸니 시청시간이 자연스레 줄었다. 주말이나 방학 저녁에 온 가족이 산책과 줄넘기를 했다. 가끔은 간식과 자전거, 배드민트 라켓, 인라인 스케이트를 챙겨 한빛 수목원에 가서 30분 놀다 돗자리를 펴별을 봤다. 토요일 가을 저녁 수목원을 다녀온 아이들을 씻기고 재운 후 남편모처럼 막걸리를 마셨다. EBS에서 아마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었다.


유리컵에 우윳빛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 "참 시원하다!" 하곤 다시 잔을 채웠다. 내가 "여보, 요즘 이 쌀막걸리가 유행인가 봐. 저번에 보니 서울 카페에선 와인잔에 막걸리를 마시더라고. 색도 다양하고. 기억나? 우리 대학 때는 찌그러진 노란 양은 막걸리잔에 마셨잖아." 했다. 남편은 "그랬지, 선배들이 강의가 끝나면 우르르 막걸리 동산에 앉아 라면에 막걸리를 사다 놓곤 지나가던 후배들을 부르기도 했는데." 하며 대학 시절을 소환했다. 두어 잔 마셨을까? TV는 아마존의 사라져 가는 부족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놓았다. 기독교 재단이 부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작은 교회와 학교를 짓는 모습이었다.


화면 가득 원주민 여인의 얼굴이 채워졌다. 목이 길게 늘어나고 군데군데 올이 터져 실밥이 이리저리 풀어진 티를 입고 나온 여인은 힘이 없었다. 얼굴 주름엔 체념과 불행이 새겨진 듯했다. 힘없는 말소리와 불안한 눈빛! 색 바랜 늘어난 티와 함께 나타난 여인은 묘하게도 칼라화면을 흑백 화면으며 만들었다. 평화롭던 마을이, 아이들의 해맑던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라 말하던 아주 짧은 순간, 그녀는 분노와 원망이 한데 뒤엉킨 눈빛을 카메라 너머로 보냈다. 마을 주민은 흩어졌고, 아이들은 모두 타지로 돈을 벌러 갔으며, 아직 부모 손이 필요한 어린아이들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까만 눈을 반짝이며 그녀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학교와 교회가 들어설 장소라는 한편에는 나무들이 일찌감치 베어져 있었다. 우람했던 나무들은 중장비들에 의해 잘리어 트럭에 옮겨지고 현장 소장인 듯 안전모를 옹골지게 머리에 쓴 사람이 쉼 없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작업자들이 분주히 이동하는 소리와 중장비 소리, 나무를 자르는 전동톱 소리가 가득했다. 인터뷰에 응한 열여섯 소년은 교육을 받은 후 도시로 나가겠다 했다. 소년은 "이곳엔 희망이 없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했다. 소년의 가슴속에 가득 찼던 아마존은 텅 빈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레이션을 하는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질문을 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일까요?" 라며. 밀림의 파괴를, 획일화된 개발을, 작은 부족의 해체를, 교회와 학교의 건설을 담담하게 말하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라고 물었다. 나에게 묻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종교단체에게 묻는 것인지, 아마존 부족에게 묻는 것인지, 잔잔하게 물었다.


막걸리를 마시며 TV를 보다 혼잣말처럼 "더 배우면 더 행복해지나? 행복이 꼭 제도권 교육과 신의 세례로 주어지는가 말이야?" 했다. 그냥 던진 내 말에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행복에도 단계가 있어. 절대적 행복이 아닌 상대적 행복 말이야. 10의 행복을 기준으로 그들이 2의 행복만 알아서 2가 만족됐다고 100%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 했다. 나는 막걸리잔을 비우며 "상대적 행복? 그건 누가 정하는데?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면 그만이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내 행복을 평하겠다는 발상은 뭐지?" 했다.


남편은 목소리에 힘을 넣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며 "아니 생각해봐. 선진국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고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사는 사람의 행복과 저 밀림에서 그냥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따서 한 끼를 먹고 산 사람의 행복이 어떻게 같아? 다르지. 행복에도 그 수준과 질이 있지. 그걸 당신이 몰라서 나한테 물어?" 했다. 나는 행복의 질과 수준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행복이 그냥 행복이지 무슨 수준이 있어? 가족이 있고, 먹을 것이 있고, 모두가 건강하고, 모두가 사랑하며 살면 그게 행복이지, 그걸 질을 따져가며 수준으로 나눈다? 난 동의할 수 없는데." 했다.


남편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듯 나를 봤다. "행복이 그리 간단하게 성취되는 것이라 생각하다니 참 어이없네. 의식주의 기본이 형성되면 그 이상의 추구 지점이 생기는 것이고 어떻게 미국의 삶과 아마존 부족의 삶을 동일선상에서 평가되나? 그게 가당키나 해? 사람살이가 다르고 교육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데. 그래서 행복의 질적 차이를 말하는 거야. 나는 그런 의미로 상대적 행복이라 하는 거고." 했다.


나는 "당신은 잉여 생산이 충분치 않을 때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초기 부족 국가던, 중세사회건, 자본주의건 생산기술과 생산력이 변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에 행복의 질과 수준을 경제적 잣대로 사회발전 단계로 구분 짓겠다는 것이야? 엄격히 말하면 사회는 발전하는 게 아냐. 최소한 행복이란 면에선 발전이 아냐. 체제에 따라 사는 모습이 바뀔 뿐이지 그건 행복과는 아무 상관없어. 무슨 행복이 사회 구성 형태와 경제발전과 관계가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했다.


남편은 이제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당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초기 부족 국가의 행복과 지금 자본주의 시대의 행복이 같다고 생각해? 다르지. 질과 수준이 다른 사회를 어떻게 비교해? 이해할 수가 없네. 상대적 행복이 존재하니까 내가 그리 말하는 거지. 아이들 교육시키고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자 분주히 배우고 노력하는 게 다 상대적 행복을 채우기 위해 하는 발버둥 아냐? 당신이 그냥 먹고사는 것으로만 만족하며 살 수 있어? 당신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잖아. 그 누구보다 노력하며 성취를 이루며 살면서.. 아니 절대적 행복이라니? 말이 돼?" 했다.


도돌이표 같은 말을 했다. 다큐멘터리는 끝이 났지만 우린 서로 씩씩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러니까 당신 말을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난 상대적 행복, 질적 차이가 발생하는 행복이라는 그 명명 자체가 행복에 대한 이해를 분자나 전자처럼 쪼개서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으로 만들어 놓고는, 정작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한 조건을 한껏 높여 삶을 주눅 들게 한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행복하면 행복한 것이지... 뭐 그리 단서가 많냔 말이지." 했다.


남편은 정말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아니 그럼 밀림 원주민의 행복이 여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의 행복과 같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같아. 당신 정말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 하며 남편도 격분하여 나를 잡아먹을 듯 봤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나는 목소리를 더 높여 "부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신문에 났던데. 그럼 못 사는 나라는, GNP, GDP가 낮은 나라는 다 불행한 나라야? 그럼 부탄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 말은 뭐야? 그건 선진국 사람들이 조사한 것 아냐? 경제적, 교육적 상황이 어떻게 행복과 직결되는 거야.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당신이 하니가 하는 말 아냐." 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말했다. 목이 아팠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둘이 막걸리를 먹다 '뭣이 행복인데.'라는 문제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싸웠다.


우리 부부는 좀 채로 싸우지 않는다. 얘들 교육이던, 시댁 문제던, 친정 문제던, 직장 문제던, 모두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하니 싸울 일이 없었다(북한 체제 문제만 예외로 하고). 그런데 행복에 대한 생각의 다름을 확인하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뒤 나는 종종 남편을 "여보~ 상대적 행복론자님!"이라 부르기도 했다. 논쟁도 아닌 싸움에 가까운 소리 지름이 있고 난 후 남편의 논리를 시간 날 때마다 생각했다. 행복도 차원이 다르다는 그 말이 맘속에 살아 꿈틀댔다. '정말 행복에도 차원이 있는 건가? 행복을 누군가 정해진 선으로 잘라 품평할 수 있는 건가?' 하고 말이다.


결혼하여 13년을 살았는데 무엇이 다른지 처음 알았다. 생각의 저 깊숙한 곳, 세상을 바라보는 눈, 행복을 바라보는 차이를 발견하였으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정말 궁금했다. 왜 이런 근본적 시각 차가 발생하는지, 그 근본에 숨어 있을 철학적 논리가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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