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세계 15
3년 전 마니또(공식 44년 지기 친구, 남자 3명: M1, M2, M3, 여자명 5:F1, F2, F3, F4, 나: 초등 3학년 세례성사 동창이며, 주일학교 졸업 동기, 주일학교 교사 동기) 약속이 잡혔다 하니, 남편은 부러운 눈빛과 어투로 “언제 만나?” 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만나” 하니, “그럼 난 뭐하나?” 하고는, “자고 올 거야? 아님 그냥 내려와?” 성별이 섞인 이 여덟 명이 작당을 하면, 1박 2일도 마다치 않고 모여 노는 것을 아는 남편은, 구차하게 같이 가고 싶다고도 못하고, 쩨쩨하게 가지 말라고도 못하고, 마니또 친구들 얘기만 하면 부러움이 한가득이다. 마니또 멤버가 모두 결혼한 후, 여자들이 “남편과 아이들도 함께 할까?” 하니, 남자들이 “괜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인생 피곤하다.(M1왈)”, “직장생활도 피곤한데, 집은 지켜야 한다.(M2왈)”,“야~ 입 조심해가며 모임 하려면 하지 마!(M3왈)” 하며 한사코 손사래를 쳐 모임은 우리들끼리만 하기로 했었다.
남편은 나이도 비슷하니 함께 하고 싶어 했지만 모임 분위기상 나 혼자서만 남편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그건 우리들의 대화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순화될 수 없는 우리들만의 날 것 같은 추억을 소환하고, 이를 요리 삼아 솔직하게 대화하는 모임의 성격상 남편의 출현은 모두에게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남편은 늘 부러워하며 “잘 다녀오라” 했고, 난 ‘부럽지’ 하는 마음으로 쌩 달려갔다. 도착하면 남편에게 메시지를 날리고, 출발 땐 이제 출발한다고 전화를 하곤 했다. 남편이 자정 무렵 궁금함을 못 참고 언제 오는지 전화를 하면, 친구들은 야유와 함께 “ 걱정이고, 사랑이다” 며 흉을 봤다.
운전을 해야 해서 음료수를 마시며 내가 “좀 답답하지, 인생이? 우린 정말 이젠 변할 게 없네” 했을 때, 남자 친구던, 여자 친구던 이구동성으로 “인생이 뭐 그렇지”했다. 내가 "결혼기념일에 인생 참 무료하다고 하니 아들이 남편을 바꾸라더라!” 했더니 모두들 웃음보가 터졌다. 남자 친구(M1, M2, M3) 세명은 이구동성으로 “고놈 참” 하고, 여자 친구들(F1, F2, F3, F4)는 손뼉을 치고 입을 쩍 벌리며 크게 웃었다. 친구 중 솔직함으로는 단연 최고인 친구 F1이 “참~ 아들 야무지다”라면 감탄을 했다. M3는 빙글빙글 웃으며 “야~ 네 남편과는 다르게, 네 아들은 센스 있다.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하네”하고, M2는 “네 남편, 기분 상했겠네~” 하니, F1이 “야, 얘 남편도 다른 여자 만나면 되는데, 뭐가 안 좋아? 속으로 웃었겠지” 했다. F2는 “어떻게 키우면 아들이 그런 말을 아빠 있는 데서 하냐? 상상이 안 간다”했고, F3는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하며 고개를 갸우뚱했고, F4는 "네 아들! 정말, 재밌다, 야~"했다. 한참을 웃고 나서 내가 “남편이 넉넉하니 아들이 엄마 편을 든 게지.” 하며, "여하간 아들이 파격적이지만 내 편을 들어주니까 좋더라고. 엄마 인생을 그리 생각해주니 말이야." 했다. 다들 한동안 기분 좋게 웃었더랬다.
M3가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곤 “네 남편은 좀 특이해!” 내가 “뭐가?” 하고 물으니, “일반적이진 않지”하며 마저 술잔을 비웠다. 내가 “그래? 뭐가?” 했더니, “네가 결혼해서 살아온 방식을 봐, 그게 일반적이냐?” 허긴 결혼 후 직장생활과 박사과정, 그 후 아이 둘을 놓고 홀로 유학 간 것 등 보수적인 양쪽 집을, 남편은 설득하여 내 길을 가도록 해 준 것을 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M2가 던지듯 말했다. "난 네가 자유로운 새처럼 살 것 같았는데, 새장 같은 결혼 생활을 잘살아, 아들도 재밌고.”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하고 싶은 것은 누가 말려도 하는 내 성격을 아는지라, 친구들은 내가 결혼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남자가 고생길을 자처하나 궁금해했었다. 심지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함을 들고 온 남편에게 “자네가 쟤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고생이 참 많을 걸세”했고, 남편은 그 말을 "딸을 보내기 싫어하며 아쉬움이 담긴 완곡한 서운함의 표현으로 들었다." 했다. 남편은 "결혼하고 한 5년 흐르고 나서야 장인이 한 말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 임을 깨달았다." 했단다.
남편은 결혼 20년이 넘어가자 자주 각오가 담긴 앙다문 입을 했다. M2의 ‘새장 같은 생활을 잘 견딘다’는 말이 그날 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되뇌어졌다. 44년 지기 친구들!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의 화살을 주고받는 사이다. 용기의 화살, 자성의 화살, 위로의 화살, 사랑의 화살, 칭찬의 화살을 말이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집에 오니, 남편은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열심히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가상공간에서 수많은 사탕이 없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중독성이 남달라 남편은 영화를 보면서도, 뉴스를 보면서도, 스포츠 게임을 보면서도, 사탕 깨기를 했다. 핸드폰을 잡고 눈인사를 하는 남편에게, “여보, M2가 난 자유롭게 새처럼 살 것 같았다네”하며 말을 전했다. “그런데 내가 의외로 결혼이란 새장에서 잘 지낸다고 하더군, 어떻게 생각해?” 하며 거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남편을 바라보니, 남편은 핸드폰 게임을 멈추고 알 수 없는 미소로 날 바라봤다.
“아니~ M2가 그러잖아, ‘새장 같은 결혼생활을 잘한다’고 말이야, 아주 딱 맞는 표현이더라고, 새장 같은 결혼생활!” 친구들과 온갖 수다를 떨고 와 한껏 생기를 얻어 발랄하게 말하는 내게 남편은 날 어찌 골려 먹을까 고민하듯 눈을 빛냈다. “왜 말이 없어?”하니, 남편은 자세를 고추 세우곤 “잘 다녀왔구먼! 잘 놀고” 했다. “그럼 잘 놀았지, 얼마나 웃었는지 턱이 아파, 턱이, 아들이 ‘남편을 바꾸세요’ 했던 말을 했더니 다들 깝놀 하는데 F1이 뭐라 했느지 알아? 글쎄. 입장을 바꾸면 그건 당신에게 엄청난 기회라나?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는데, 역시 F1은 탁월하더라고, 바로 당신 입장에서 위기가 아니라 좋은 기회라고 말이야, 잘 키운 아들이 부모에게 최상의 기회를 가져보라고 했다며, 걔는 아주 창조적인 해석을 하더라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했더니 남편은 실실 웃으며 "아~ 그런가? 그렇게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네. 역시 F1씨는 예상을 뛰어넘어." 하며 고개를 심하게 끄덕였다.
"그건 그거고, M2가 새장 같은 결혼생활이란 표현을 했는데 운전하고 내려오며 자꾸 생각나더라고, 표현이 정말 딱 맞아? 그렇지? 답답할듯한 결혼생활을 내가 잘 참고 살고 있다며 걔네들이 날 대견하게 생각하더라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했다. 남편은 능글능글 웃으며 “그러게 대견하네. 그렇지만 나니까 가능한 거야. 내가 최선을 다해서~!" 했다. 내가 눈을 흘기며 "당신이 뭔 최선을 했을까? 당신이 새장을 넓게 만들었나? 아니지, 새장을 계속 늘려서 내가 그걸 모르나?” 했더니, 남편은 웃으며, “그걸 몰라?” 했다. 내가 “뭘 몰라?” 했더니, 남편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끄곤 내 눈을 들여다보곤 한마디 했다. “내가 새장을 들고 다닌걸! 몰랐어?”
남편이 새장의 손잡이를 잡듯 한 손을 올리며 “난 당신이 들어있는 새장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들고 움직였는데, 그걸 몰랐어?”했다. “뭐라고? 내가 든 새장을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였다고?”, “그럼, 여태 그걸 몰랐어? 내가 들고 다닌걸?”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손에 컵을 들고는 새장 들듯 컵을 들어 올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남편을 보고 소리쳤다, “ 여보, 당신 손 힘, 언제 빠져? 말해봐!” 남편은 내게 컵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그러게 힘이 언제 빠질까?” 하며 밝게 웃었었다.
3년 전 두 아이들과 식사를 하며 이 말을 해주었을 때 딸은 "오~ 아빠 멋진걸!" 했고, 아들은 빙그레 웃으며 "비유가 좋은데요!" 하며 5초 정도 아빠를 유심히 쳐다봤었다. 그때 남편이 어찌나 의기양양하게 허리와 어깨를 펴던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었다. 3년이 지났다. 가끔 '정말 남편은 새장을 들고 다닌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새장을 들고 다닌다 생각하며 행복했을까?' 궁금하다. 3년 전 남편이 그리 말했을 때는 속으로 '남편은 천장 없는 새장에서 천장 있는 새장이라 생각하며 새장 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곤 피식 웃었었다.
3년 전 집을 짓고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수많은 철새들이 봄, 가을 요란하게 이동한다는 사실이다. 금강하구둑이 멀지 않은 우리 집 하늘은 그들이 비행하는 길목이라 저녁나절, 아침나절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쉽게 새들의 이동을 볼 수 있다. 새들의 비행을 보며 참 자유롭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건 내가 새가 아니니 철없이 주절거리는 소리같이 느껴졌다. 새들은 자유롭게 나는 듯 보여도 목표를 향해 쉼 없이 갈 뿐이다. 새의 생존 노동, 비행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3자가 볼 뿐이다.
내가 새가 되지 않으니 그저 자유롭다 한가한 소릴 하는 거다. '부부는, 아이를 키우는 부부는 늘 비행하다 집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남편이 “난 당신이 들어있는 새장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들고 움직였는데, 그걸 몰랐어?”했지만 돌아보면 '나도 남편이 든 새장을 들고 움직이느라 얼마나 고단했던가?' 싶다. 그뿐이랴. '해맑은 얘들을 우리 부부가 들고 날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새장 같은 결혼 생활! 맞다. 결혼은 서로의 새장이 되기도, 새장의 문지기가 되기도, 스스로 새장 속 새가 되기도, 새장을 들고 힘겹게 날아다니는 새가 되기도 하는 사이가 아닌가 싶다. 문을 열기도, 닫기도, 새장을 키우기도, 좁히기도, 움직이기도, 고정하기도, 심지어 파괴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요즘도 가끔 내가 "아~ 답답하다" 하면 남편은 손을 들고 "어디로 가? 새장을 어디로 옮겨줄까?" 하며 배시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