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한울타리 세 집! 내가 태어나기 전 부모들의 선택과 삶을 나는 모른다. 생각해보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투명 장막처럼 어른들 세계는 아이 눈에 감추어졌는가 보다. 우리 집 형제 다섯(큰언니, 오빠, 둘째 언니, 나, 남동생)과 큰집 형제 네 명(큰오빠, 작은오빠, 큰언니, 작은언니)의 사촌들은 늘 몰려다니며 놀았다. 눈이 오면 눈을 쓸며 놀고, 여름이면 큰집 마당에 모깃불을 펴고 옥수수를 먹으며 놀고, 가을이면 고구마를 쪄서 큰집 우리 집 몰려다니며 먹고, 제사가 있는 날은 자다가도 늦은 밤 일어나 제삿밥을 먹고 놀고, 추운 겨울엔 큰집 부뚜막에 군밤을 구워 먹으며 놀았다. 한 살, 두어 살 차이로 아홉 명의 아이들은 그저 소란스럽고 정신 사나웠다. 사방이 놀 곳이어서 술래잡기도, 윷놀이도, 땅따먹기도, 볏짚 놀이도, 쥐불놀이도 모두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았다. 우린 정말 송사리 때처럼 몰려다니며 놀았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에 속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세상에 속하여 산 것 같다. 어린 시절, 언니 오빠들이 타지로 고등학교 유학을 가면 남겨진 아이들이 나이순대로 남아 집 청소를 하고, 조부모 심부름을 하고, 그 또래 놀이를 하고 지냈다. 사촌형제를 포함해 아홉 명 중 여덟 번째였던 나는 대전 고등학교로 유학 오기 전까지 삼대가 모여사는 슬레이트집과 단층 벽돌집, 기와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초가집을 언제 헐고 단층 벽돌집을 지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집 앞에서 공사가 이뤄졌지만 내 집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다. 열 걸음이나 걸릴까 싶은데 인간은 내가 속한 곳과 내가 속하지 않은 곳이 명확하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큰 집의 일이어서 기억창고에 저장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부터 대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기와집에서 살았다. 기와집은 들어서면 넓은 마루가 있고 좌측으로 삼촌 방(오빠 방, 이후에 내 공부방, 그 이후에 남동생 방이 됐다.), 우측으로 부엌과 연결된 자매들 방(큰 언니, 둘째 언니가 엄마 키만 해지고 아버지가 집에 오신 날은 우리들이 자매 방에서 우리들끼리 잤다.), 마루를 지나 정면에 큰 안방이 있는 단출한 집이었다. 안방은 삼촌 방까지 길게 연결된 직사각형이었는데 윗방은 미닫이를 닫을 때만 방으로 분리되고 거의 대부분은 안방처럼 여겨졌다. 윗방은 엄마의 화장대와 옷장이 있었는데 좁은 공간이지만 집을 떠나 일하던 아버지가 한 달에 한번 집에 오시면 미닫이 문을 닫고 아버지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늘 우리들과 넓은 안방에서 함께 잠을 자던 엄마였지만 아버지가 오시는 날만 미닫이 문이 제 역할을 하여 두 분이 오붓하게 계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오신 저녁날은 미닫이 문이 닫혀 안방은 좁아졌지만 내 마음속 집은 정말 마술처럼 넓어지고 꽉 찼었다.
부엌은 연탄을 때는 곳이 세 곳이었는데, 안방과 연결된 연탄보일러 자리와 밥을 해 먹던 연탄난로, 자매들 방 연탄 구들이 기역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부엌은 자매들 방에서 여닫이 문으로 연결되어 문을 열면 늘 부엌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부엌은 외부에서도 문을 열면 깊이가 깊어 두어 계단을 내려갔고 부뚜막은 60cm 정도 높이여서 엄마는 늘 몸을 숙이고 감자를 썰거나 나물을 무치거나 했다. 학교를 다녀와 가방을 마루 한편에 던져놓고는 늘 엄마를 찾아 부엌에 갔다. 엄마를 찾기도 했지만 여름이면 엄마가 간식으로 쪄 놓았던 옥수수나 감자를, 가을과 겨울에는 고구마를, 혹은 간혹 사다 놓은 과일을 먹을까 싶어 부엌을 자연스레 들어가 찬장을 열어보거나 솥을 열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겨울 저녁이면 엄마는 늘 연탄을 갈고 물을 떠 오며 하루를 정리했다. 할아버지방, 삼촌 방, 안방, 자매 방의 연탄을 갈고는 큰집 앞 수돗가에서 물을 길어 연탄불에 올려놓은 큰 냄비에 물을 넣었다. 추운 겨울 저녁이건 새벽이건 엄마는 한결같이 뒤꼍 창고에서 연탄을 갖다 집을 한 바퀴 돌며 연탄을 갈았다. 엄마가 없을 땐 큰 언니가, 큰 언니가 없을 땐 둘째 언니가, 둘째 언니가 없을 땐 내가 연탄을 갈았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 집은 참 손이 많이 갔다. 가을이면 미닫이 나무 문을 모두 떼어내어 창호지를 정성껏 붙였다. 우리들은 늘 엄마를 도왔다. 일 년이 지나 누렇게 들뜬 창호지를 물을 묻혀 찢어내는 일, 문틀 사이사이 먼지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 창호지를 바를 풀을 쑤는 일, 창호지에 풀을 발라 문에 붙이는 일을 함께 했다. 늘 정갈한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하라는 데로 콩알처럼 뛰어다니며 도왔던 기억은 아련하다. 아침에 창호지를 붙이곤 오후 안방에 배를 깔고 누워 창호지를 보면 햇살이 얼마나 은은하게 들어왔는지 한다. 뽀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아이보리빛 햇볕은 좋았다.
매년은 아니었지만 방바닥은 창호지를 붙이고 기름을 입혔던 기억이 난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났는데 양말을 신고 방바닥을 스케이트 타듯 문지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 연탄보일러가 지나간 자리는 짙은 고동색으로 변했는데 방바닥을 따라 파이프 배선이 보여 우리 자매들은 저마다 누울 때 등과 허리를 그곳에 대곤 했었다. 손이 많이 가던 한지 장판은 나중에 PVC장판으로 바뀌었고 향긋한 기름 냄새는 그 뒤론 맡지 못했다.
오랜 시간 자란 침산동 기와집이 몇 평이고 평당 가격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내가 자란 집이지만 부모님의 집이었고 내가 살던 집이지만 기와집은 부모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닌 내게 정확한 규격과 가격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살던 집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기억나는 것은 참 소소한 것들 뿐이다. 겨울 저녁 고구마를 쪄 가족들이 모여 먹으려 모여있으면 쥐들이 천장을 우르르 우르르 돌아다니는 소리에 우리 자매들이 돌아가며 쥐들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며, "저리 돌아다니다 천장 무너지는 것 아니냐!"며 눈이 유독 크고 무서움을 심하게 타던 큰언니가 잔뜩 긴장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온 가족이 겨울 아침에는 세수를 하기 위해 밤새도록 올려놓은 큰 솥에서 뜨거운 물을 한 양동이 퍼서 마루에 떠다 놓고 세수를 푸푸 거리며 하던 일이며,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쉽게도 뜨거운 물이 적어 찬물로 세수를 해서 정신이 바짝 들던 기억이 난다. 한 겨울 두툼한 내복을 입고선 자매들이 솜이불을 서로 잡아당기며 자던 일이며, 큰언니와 엄마는 늘 작은 언니와 나와 남동생을 중앙에서 자도록 배려했던 일이 생각난다.
겨울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동쪽 큰 이중 창문을 구경했다. 코가 시려 눈을 뜨면 유리창문에는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얼음 알갱이 문양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루도 같은 문양을 본 적이 없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얼음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집안의 따스한 공기 차로 발생한 수많은 수증기 알갱이들이 우리들이 밤새도록 새록새록 숨 쉬어 낸 공기들과 합쳐져 너무도 화려한 문양을 만들어 탄성이 절로 나었다. 겨울마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얼음 그림은 아침 10시경에서 11시경 사라졌는데 할 일 없는 날에는 아침 먹고도 한참을 창문 옆에 앉아 그림이 녹는 모습을 바라봤었다. 윗풍이 심해 코가 유독 시린 날 아침은 일어나 세수를 하곤 고드름을 구경했다. 할아버지는 손녀 손자들이 집 주변을 지나다 고드름이라도 떨어져 맞을까 싶어 늘 큰 빗자루로 고드름을 쳐내셨다. 내가 예쁜 고드름을 따달라 조르면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크고 멋진 고드름을 손으로 잘라 주셨는데 정말 차갑고 반들거렸다. 그 시절 고드름을 손으로 녹여 바늘처럼 만들기도 하고, 얼음과자처럼 오독오독 씹기도 했고, 고드름을 모아 쌓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차갑고 맨질맨질한 고드름은 그 집에 살 동안 늘 겨울 놀이 중 하나였다.
여름엔 마루에 대형 모기장을 치고는 온 가족이 가판대 생선처럼 모여 잠을 잤다. 큰집 마당에 지펴진 모깃불 연기와 달팽이처럼 돌돌 말린 모기향이 밤새도록 향을 냈다. 내 기억에 기와집은 비가 오면 처마 밑으로 수많은 빗방울이 흙을 튀기며 소리를 냈다. 처마 밑을 따라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집을 뱅뱅 돌며 놀기도 하고 유독 움푹 파인 곳에 빗물이 튀기는 모습을 넋 놓고 보기도 했다. 장맛비가 지나가면 처마 밑 땅은 작은 동그라미 모양의 크고 작은 구멍을 만들었는데 참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적이었다. 그건 비의 이야기였다.
그 시절 조치원 침산동은 참 조그만 동네였다. 가로등 불은 한참 나중에서야 들어왔던 곳이라 해자 진 밤이면 길이 어두웠다. 이른 저녁을 먹고 동네 친구들과 침산동 충령탑 공터에서 한참을 놀다 집에 가려면 어두웠다. 어둠이 좋았다. 하루가 다 갔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짙은 어둠이, 동네 친구들과 손을 잡고 살살 걷던 그 어둡던 길이, 그 끝에 내가 살던 집에서 새어 나오던 아련한 불빛이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잠을 잘 때와 깨어있을 때를 아는 자연 속의 내가 살던 집이 좋았다.
내가 자라던 집은 우리와 함께 살아서 쉼 쉬는 집이었다. 가로등이 없던 때 집에 불을 끄면 집은 어둠 자체였다. 집은 밤에 우리와 함께 자고 아침에 함께 깨어났었다. 우리와 숨바꼭질하듯 함께 있던 집, 사시사철 우리에게 계절을 알려주던 집, 그게 바로 나의 어린 시절 집이었다.
나와 함께 잠을 자고 나와 함께 일어나 부산하게 하루를 사는 집을 언젠가는 지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2015년 미국 연수 후 군산에 도착하여 의료원 숙소에 잠시 머무를 때, 지나가는 도로에서 택지 분양 현수막을 보곤 집을 짓겠다 하니 남편이 "뭐라고? 집을 진다고? 어디다?" 했다. 내가 "지금 막 지나오며 봤는데, 군산에서 택지 분양을 하네! 미분양분이 있데. 시청에 가보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