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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루시아 Nov 15. 2020

아버지의 집짓기

집짓기 2: 새벽까지 집 설계를 하던 아버지



삼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생활! 부산하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떠들고 몰려다니고 가끔 싸우기도 해서 말이다. 그런데  시절을 생각하면 유독 할머니와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집에 계시지 않았고, 큰아버지는 하루 종일 밭농사를 지어 저녁나절에나 집에 들어오셨고, 엄마와 큰엄마도 농사일을 돕거나 이런저런 일들로 바빴으니 하루 종일 집을 지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책을 읽었다. 밥을 하지도, 청소를 하지도, 빨래를 하지도, 마당을 쓸지도 않고 늘 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써진 소설책을 읽으며 가끔 담뱃대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웠다. 할머니는 잘 웃지도, 말씀도 많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한 날은 손녀들을 지지배라 부르며,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몸에서 차가운 냉기를 뿜었다. 


할머니의 주특기라면 감추어둔 간식을 손자들만 챙겨주는 일이었다. 손녀들이 돌아가며 청소며, 고무신 닦기, 심부름을 해주었지만 "잘했다, 고맙다." 칭찬은커녕 청소가 시원치 않거나 소란스러우면 눈에 힘을 주곤 "쓸데없는 지지배!"라 혼을 냈다. 언니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모른척했지만 나는 말대답을 했다. "할머니! 청소도, 심부름도 저희가 하는데, 왜 그러세요?" 하면 "지지배가 말대답하는 것이 참 ~"하며 할머니는 마른 혀를 찼고, 할아버지는 웃으며 "그래 맞다. 네가 효녀다. 청소도 하고, 신발도 깨끗이 닦고 말이다." 했다. 엄마는 "그럼 못써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하며 나를 타일렀다.  할머니는 손이 귀한 집안에 시집와 아들 4, 딸 2를 낳았다.   

 

집 앞마당에 조그만 화단을 만들어 놓았었는데 수국 꽃이 시간을 달리하며 변하는 모습은 참 고왔고 할머니는 그런 수국을 좋아했다. 여름에는 책을 덮고 한참 수국을 쳐다보셨었다. 모란꽃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지나가듯 "향이 없는 꽃이라 나비가 없지!" 해마다 중얼거렸다.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할머니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할머니는 환갑 후 돌아가실 때까지 직장암 수술과 오른팔 뼈(상완 뼈)가 부러져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어른들이 한동안 부산하게 소곤거린 후 할머니는 서울 병원(국군수도병원)을 다녀오셨다. 기운이 쏙 빠진 할머니는 허리춤에 대변 주머니를 달고 내려오셨다. 의사들이 뱃속 장기 위치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병원에 다녀오신 후 할머니 방은 늘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수술(직장암 수술) 받은 후 몸에 좋다는 음식을 챙기셨다. 어느 날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청개구리가 몸에 좋다고 고기도 안 드시는 분이 그걸 먹겠나!" 하기에 내가 "할머니가 청개구리를 먹어요? 정말?" 했던 기억이 난다.  청개구리가 몸에 좋다 하자 큰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산 청개구리를 잡아왔고 할머니는 청개구리를  쌈에 싸서 삼켰다 했다. 내가 그 말을 들었을 때 할머니가 아닌 청개구리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 할머니는 고기를 먹지 않는 분이어서 생신날에도 고깃국이 아닌 그냥 들깨 미역국을 드셨던 분이었는데 '생명이란 참 모질구나' 생각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3년 정도 누워 지내셨다. 아버지는 병간호를 위해 슬레이트 집과 우리 집, 큰 집을 긴 전선으로 연결했었다. 양쪽 집에 연결된 초인종 소리는 할머니의 부름이었고 식구들은 첫째냐, 둘째 며느리냐를 따지지도 않고, 몇째 손녀 인지도 중요치 않게 소리를 들으면 할머니에게 달려갔었다. 누구도 꾀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엄마도, 간호사 공부를 하던 큰언니도, 착한 둘째 언니도, 순하고 부지런한 큰집 큰언니와 작은언니도 말이다. 최소한 내 눈에는 그랬다. 모두 할머니의 부름에 돌아가며 할머니의 슬레이트 집 방에 들어가 할머니 병간호를 했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할머니는 가족들 속에서 돌아가셨다. 큰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말씀하셨다. 내가 엄마에게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 하니 "할머니 허리가 바닥에 붙었다구나!" 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마는 어른들은 할머니를 우리 집 삼촌 방에 옮기고 부산하게 집안 정리를 했더랬다.


할머니는 조용히 돌아가셨다. 엄마와 큰엄마가 눈물을 흘렸고 두 고모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할아버지가 한지를 잘라 할머니 코에 대니 종이가 그대로 있었다. 할아버지는 벽에 있던 시계를 쳐다보곤 시간을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다섯 살 위의 신부를 맞아 6명의 자녀를 낳아 한평생 함께 한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할머니의 살짝 벌어진 입을 잡아주곤 한동안 볼을 쓰다듬었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앉아서 할머니 발을 주무르고 있었는데 '생과 사는 경계가 모호하게 다가와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큰 곡소리도 큰 울음도 없이 잔잔하게 햇볕 드는 우리 집 작은 방(삼촌 방)에서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여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봤다. 할아버지는 눈이 촉촉해지셨는데 한동안 할머니 얼굴을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고모들이 슬픔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지만 할머니 혼이 놀라지 않도록 감정을 억눌렀고 큰아버지도 담담하게 할머니 죽음을 지켜보셨다.  


참 따스했다. 할머니 죽음은. 조용하면서도 정갈했고 모두가 아쉬움 속에서 할머니 혼의 평온함을 빌었으니 말이다. 어린 나는 할머니 발을 계속 주무르다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할머니 발을 잡고 있었는데 발의 온기는 그대로 남아있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가 싶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대학교 1학년 겨울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집을 지을 마음을 먹었다. 내가 "어디다 집을 져요?" 하고 물으니 엄마는 "사과밭 중앙에 도로가 난다는구나. 그래서 쪼개진 밭 중 하나에 집을 진다고 그러시네!" 했다. "집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돈은 있어요? 맨날 돈이 없다고 했잖아요." 하니 엄마는 "도로 날 때 나오는 보상금과 모아둔 돈으로 지어야지. 앞으로는 허리띠를 더 조여매고~." 하셨다.


사과밭에 길이 나자 사과농사는 중지됐다. 구릉에 가득 들어선 복숭아밭, 배밭, 사과밭들 사이를 휑하기 지나는 아스팔트 2차선은 시원했지만 냉정했다. 그 많은 밭들을 직선으로 가로지어 벌들과 나비들과 개구리들이 오손도손 살던 곳을 양쪽으로 갈라버렸으니 말이다. 도로가 나며  전봇대가 길을 따라 드문드문 세워졌지만 누가 이런 길을 차를 몰고 지나갈지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집을 짓겠다니! 밤에는 오도 가도 못할 곳에 집을 짓는구나 싶었다. 주변이 모두 밭이고 주택은 전무한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대가 모여 살아 늘 붐비던 집에서 부모님은 진정 조용한 당신들만의 집을 갖겠다 작정한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몇 달 집에 계시며 날마다 집 설계를 하셨다. 경지정리와 교량 건설을 주로 했던 아버지에게 집 설계는 다른 영역의 일이었지만 열정은 그대로 보였다. 눈금이 작은 모눈종이에 밤이 새도록 도면을 그렸다. 한 달이 지났을까 정면, 측면, 배면도를 보여주셨던 기억이 난다. 이층 집 도면이었는데 집안과 집 밖 모두에서 이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는 구조로 우리들이 모두 타지로 취직하여 나가면 이층을 셋집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일층에는 거실과 안방, 큰 딸방, 작은 아들방, 부엌, 화장실이 있었고 이층은 방 두 개에 화장실 부엌, 넓은 베란다가 있었다. 아버지가 몇 달 도면을 작성하며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한다. 할머니를 닮아 좀처럼 잘 웃지 않던 아버지인데 얼굴에 온통 미소가 배어 있었고 가끔 무언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입을 앙다물고 한껏 눈썹을 각지게 만들기도 하셨었다. 식사를 하시면서도 도면을 흘끔거리고 새벽까지 안방 불을 켜고 연필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해 아침에 안방에 들어가면 지우게 가루가 작은 책상에 그득했었다.


어느 주말 아버지가 내게 도면을 밀며 "어떠냐?" 했다. 가정 수업에서 간단한 도면 그림을 배우긴 했지만 도면으로 3차원 입체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지 않은가? 아버지는 집의 향과 대문의 예상 위치, 현관과 안방, 부엌과 딸들 방, 아들방, 화장실을 하나하나 집어주며 설명해 주셨다. 아버지가 상상한 집이, 방들이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내밀듯했다. 아버지는 이건 여닫이 문이고, 이건 미닫이 문이고, 여긴 다용도실이고, 이건 지하실로 기름보일러를 쓸 생각이라 하셨다. 아버지는 새집에 대한 부푼 꿈이 가득했고 옆에서 듣던 엄마는 입꼬리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나는 귀담아는 들었지만 질문이라고는 "아버지 이게 얼마난 크게에요? 지금 안방보다 새집 안방은 더 큰 거예요? 얼마나 더 큰 거예요?" 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크지 훨씬 크지." 했다.


아버지 설명을 듣던 엄마는 늘 웃었다. 너무 좋아 웃었음을 내가 결혼해 며느리가 돼보니 알겠다. 십수 년을 삼대가 함께 살았으니 엄마의 불편함과 노고가 얼마나 컸겠는가 말이다. 그때는 새것이라 좋은가 보다 싶었는데 분가하여 자유롭게 사는 삶이 성큼 다가왔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엄마는 그리 좋았던 듯했다.



2015년 8월 중순 군산시청 공영사업과에 전화를 하니 방문하여 미분양 토지 위치와 분양가를 받아가라 했다. 공영사업과를 가니 40대 중반 여자 공무원이 서류봉투에 분양 도면과 분양 가격이 붙은 자료를 주며 사무실 한편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앉아 살펴봐도 된다 하며 활짝 웃었다. 남편과 앉아 분양 도면을 살펴봤다. 큰 도로를 따라선 점포주택이 있지만 내측에는 주택만 지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집이 다 지어지면 조용한 마을이 될 것 같았다. 택지는 적당한 크기로 구획돼 있었다. 택지는 양쪽 큰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기본 편의시설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택지 북서쪽에 큰 마트와 병원들, 북쪽에 경찰서와 초등학교, 동쪽으로 체육시설, 정남에는 드넓은 논밭, 남서쪽은 남편 직장인 의료원이 있어 차로 5~10분, 걸어서 20분이면 모든 편의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인도가 지나가는 택지는 거의 없었는데 딱 한 곳이 미분양 상태였다. 무슨 연유로 그 땅이 선택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대문을 동쪽으로 내고 정남향으로 집을 앉힐 수 있는 구조였고 무엇보다도 집 앞이 인도여서 앞집과의 거리가 멀게 확보되어 좋았다. 내가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곳을 하자 하니 남편 표정이 굳었다. "비싸네~ 생각보다." 하길래 내가 "대전 아파트를 팔면 되지." 했다. 남편은 머리를 도래도래 흔들며 "그게 말처럼 쉬워?" 했고, 나는 "내놓으면 팔리겠지." 했다. 대전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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