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3: 사과밭에 자리 잡은 부모님의 집
동서로 갈라진 사과나무밭 서쪽에 아버지는 "집을 짓겠다." 했다. 주말에 사과밭에 가보니 집을 앉힐 곳의 사과나무들은 이미 베어져 어디론가 실려간 상태였고 땅을 고르느라 중장비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작업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기도 묻기도 상의하기도 했다.
집 짓는 현장에 아버지가 있었다면 엄마는 일꾼 새참과 아버지 식사를 챙기느라 부산했다. 엄마는 생기가 넘쳤고 아버지는 짓고 있는 집에 대한 기대가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는 집 짓는 일정이며, 들어가는 돈 계산에 끝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차를 몇 번 더 부르면 얼마가 더 들고, 벽돌 값, 거실 나무 마감재 값, 기와 값을 말하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고, 부엌에 들일 가구와 거실 안방 가구 등 신혼집을 꾸미듯 입가에 미소를 담고 대화를 했다. 엄마가 "아이고 돈이 한참 더 들겠네요." 하는 말속에도 분가의 기쁨은 차고 넘쳤다. 새집에 대한 기대보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땅을 파고 레미콘 차가 와 시멘트를 부을 때 큰아버지도 자전거를 타고 작업 현장에 오셔서 구경했다. 대학생인 나는 가끔 진행사항을 구경하러 갔을 뿐 사실 집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의 중대사도 자식에겐 소소한 추억거리인 경우가 있는데 집 짓기가 그랬다. 엄마는 늘 "돈이 밑 빠진 독에 물들어가듯한다."고 걱정했지만 나는 그 말소리를 물 흘려보내듯 들었다.
아버지는 정성 들여 집을 지었다. 구들에 자갈을 넉넉히 넣었다는 소리며 두 아들의 상징으로 기둥 두 개를 세 딸을 생각해서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세 개의 둥근 창문을 내었다 하셨다. 붉은 벽돌과 검은 기와지붕, 일층과 이층의 경계처럼 앞쪽의 이층 테라스 턱은 흰색 페인트로 마감됐다. 이백 평 정도 되는 대지에 남서쪽에는 늙은 사과나무 대여섯 그루가 남아 있었고 사과밭의 탱자나무 울타리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탱자나무는 내 키보다 높이 자라 간 큰 도둑이라도 담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두터웠다.
집 뒤꼍 북쪽에는 수돗가를 널직이 만들어 김장을 담거나 큰 그릇 설거지를 할 때 쉽게 쓸 수 있는 샘터를 만들었고 그 옆에는 큰 솥을 걸고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었다. 종종 엄마, 아버지는 그 큰 솥에 닭을 댓마리 넣고 삼계탕을, 구수하고 깔깔한 사골 우거짓국을 끓여주었는데 온 가족이 집에 모이면 그리 맛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추운 늦가을엔 할 일 없이 솥에 물을 넣고 마른 콩대, 깨대, 고춧대를 태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불을 보며 생각을 비운 게 아닌가 싶다. 요란스럽게 캠핑이니 불멍(불꽃을 보며 멍청하게 앉아있는 상태)을 하는 요즘 사람살이를 보면 부모님은 일찌감치 불멍을 생활화한 것 같다. 뒤꼍에 불을 붙이면 집 안팎은 마른 가지 타는 냄새와 함께 잔잔한 연기가 집을 감싸 훈훈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나 엄마가 불을 펴고 있으면 탁탁 타들어가는 마른 가지 소리를 들으려 나는 낮은 의자(목욕탕 의자)에 쪼그려 앉아 불을 한동안 멍청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집이란 원래 멍청하게 있어도 좋은 공간인데 정말 뇌 속을 텅 비우는 공간은 죽기 전에 꼭 만들어 볼일이라 생각했다. 사람살이가 작은 소리, 냄새만으로 훈훈해질 수 있는 건 추억과 경험이 물리적 시그널의 결과라는 뇌의 전기적 작용을 넘어 감정을 불러와서 그런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단독주택은 늘 도둑 걱정이다. 주변에 집도 없으니 걱정 없다면 거짓말이지 싶다. 아버지는 도로를 따라 시멘트 블록 담을 쌓았다. 대문은 도로에서 3미터 정도 들어와 자동차가 넉넉히 들어올 수 있는 크기의 철제 대문을 달았다. 대문 옆 벽돌 축대엔 정성껏 한자로 파 놓은 아버지 명패를 달았고 그 아래 빨간 우편함을 매달아 놨다. 사과나무밭이 완만한 구릉의 중간 정도 위치여서 집터로서 낮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일 미터 정도 집 기초를 올려 외부에 넉넉한 수납공간을 만들었고 그 높이 때문에 집은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초록 과수원 중 이층 붉은 벽돌집은 구릉의 중턱에 사뿐히 앉아있었다. 지나가던 도둑도 쉽게 담을 넣을 수 있을 터였지만 부모님이 사시는 동안 한 번도 도둑은 들지 않았다. 늘 신실하게 기도하던 엄마의 기돗발이었는지 들어가 봐도 뭐 나올 게 없어 보였는지 도둑은 들지 않았고 사실 집에 있는 것도 없었다.
어떻게 짐을 옮겼는지 모른다. 이사는 부모님의 일이었고 주말에 이사 간 집으로 들어갔다. 침산동 기와집이 오밀조밀했다면 신흥동 이층 집은 넓었다. 거실도, 안방도, 부엌도, 딸 방, 아들 방도 모두 넓었다. 딸방은 딸이 셋이니 아들(두 아들) 방보다 넓었지만 엄마가 시집와 맘먹고 산 첫 번째 장롱을 옮겨 놓아 가벼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불과 옷을 넣는 6작 장이었는데 지금처럼 붙박이를 만들지 않던 시절이니 장롱은 필수품이었다. 농이 있었어도 방은 참 넓었다. 지금 그 공간을 보면 좁다 하겠지만 말이다. 인생처럼 공간은 늘 상대적이다.
처음 신흥동 이층 집으로 오라는 엄마 말에 혼자 조치원 역에서 집에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한참 걸어 들어간 집은 넓은 구릉에 혼자 앉아 있었다. 사방 과수원을 가로 지나는 도로 옆 중턱에 있던 이층 벽돌집은 빨갛게 웃고 있었다. 사거리에서 집까지 가도 가도 멀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거실에 아버지와 엄마는 환한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집은 온전히 부모님만의 공간이었는데 엄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했다.
기와집에서 신발을 신고 몇 계단을 내려가던 부엌은 사라졌다. 가스레인지가 떡하니 싱크대 위에 있어 25개 구멍을 맞추어 연탄을 갈고 연탄가스를 맡으며 밥을 하던 추억은 멀어졌다. 늘 밥 하고 반찬 만들어 쟁반으로 찬을 옮겨 밥상을 차리던 엄마였다. 세 자매도 엄마를 도와 쟁반을 들고 서너 번 부엌에서 안방으로 날라야 했던 식사 준비가 새집에선 부엌 한편에 마련된 6인용 식탁에 뚝딱 차려졌다. 공간이 바뀌니 동작도 바뀌고 삶이 바뀜을 그때 알았다. 아버지는 새 집을 지었지만 엄마는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엄마는 시부모, 시댁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분리 독립을, 연탄 갈기로 시작하는 잔 부엌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새 삶을 살게 됐다.
집을 짓고 큰언니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은 화장실이었다. 기와집 화장실은 북쪽에 별도로 위치한 재래식 화장실이었는데 냄새도 냄새지만 밤이면 무서움을 많이 타던 큰언니가 늘 나를 데리고 갔었다. 화장실 문 앞에서 언니가 볼일을 보는 동안 나는 하늘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을 보며 겨울이면 입김을 불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함께 했던 늦은 밤 화장실 나들이는 사라져 좋았지만 밤마다 인간의 냄새를 맡으며 하늘에 쨍하고 빛나던 수많은 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쉬웠다. 사실 사람이 생리적인 욕구보다 더 큰 동인은 없지 않은가? 별을 보자고 현관문을 열고 밤 열 시 넘어 스무 살 대학생이 정원을 거닐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쉽지 않지 않겠는가? 별을 보는 일은 내가 군산에 집을 짓고 마당을 얻고 나서야 일상이 됐다.
거실 한편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은 반들반들했다. 계단 벽면 딸을 상징한다는 세 개의 동그란 창문엔 늘 잔잔한 햇볕이 들었다. 아버지는 집을 완전한 남향으로 짓지 않고 남서향으로 지어 저녁에는 늘 동그란 창을 통해 햇볕이 쨍하게 계단을 비추었다. 특히 해가 질 때 좁은 나무계단에 앉아 창밖을 보면 드넓은 과수원 구릉 위로 붉은 해가 타오르듯 지는 게 너무 아름다웠다. 지금이나 그때나 해는 늘 떠오르고 지지만 살면서 넋 놓고 앉아 노을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말이다. 그 좁은 공간을 나는 자주 이용했다. 그냥 거실 한 편의 문을 열고 이층 계단에 앉아 엄마가 저녁 먹어라 소리칠 때까지 지는 해와 노을, 사방의 과수원 나무들을 할일없이 바라봤다. 계단은 거실과 이층으로 연결되었지만 일층에도 문이 있고 이층에도 문이 있어 서로 잠그면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로 조용하고 비밀스러웠다. 이층 집은 한동안 비어있어 엄마는 봄, 가을 이불 홑청 빨래를 하고 이층 베란다에 긴 빨랫줄을 걸고 파란 하늘에 하얀 이불 홑청이 나부끼도록 말렸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시원하고 속이 탁 트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침산동 집은 조부모가 계실 때처럼 재미나지 않았다. 우리들이 모두 성장해서도, 모두 타지로 나와서도 그랬지만 할아버지가 있을 때 집안에 탄탄하게 연결되어있던 끈이 뚝 끊어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신흥동 사과밭으로 이사한 후 자유가 집안 가득했다. 집을 짓고 아버지는 다시 일을 나가셨지만 엄마는 혼자 있어도 너무 좋다 하셨다. 내가 "밤에 무섭지 않아?" 했더니 "뭐가 무섭니 좋기만 하다." 했었다. 집을 짓고 엄마는 얼굴이 폈다.
아버지, 엄마는 기와집을 짓고 부모와 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분가를 했다. 인가라고는 한 채도 없는 과수원 구릉 중앙에 집을 짓고 두 분은 좋아했다. 탱자나무 울타리 근처에 도라지와 더덕을 심고, 사과나무 아래 상추, 고추, 부추, 골파를 심어 자급자족했고, 혼자 있는 엄마를 위해 아무거나 잘 먹고 잘 짓는 어린 누렁개를 들여 대문 앞에 재웠다.
내가 자라던 삼대가 살던 집도 평당 가격과 무관한 곳이었지만 행복했다. 아버지가 지은 사과나무밭 집도 두 분이 조용히 살고 싶어 지은 집일 뿐 평당 가격과는 상관없는 곳이었다. 늘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던 아버지 엄마였지만 삶의 터전이 되던 집은 돈 중심이 아닌 삶 중심이었다. 두 분은 늘 근검절약했지만 그건 돈에 휘둘려 살지 않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군산 시청 공영사업과를 다녀온 후 동그라미 친 곳과 실제 땅 위치를 확인하러 택지 개발현장을 가보니 정신 사나웠다. 중장비들이 사방 이곳저곳을 파놓고 길을 내고 있었다. 어디가 어디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남편과 한참 지도와 현장 위치를 가늠하느라 뇌를 총동원했다. 대략 위치를 살펴보곤 나쁘지 않겠다 싶어 계약을 한다 하니 남편은 "대전 아파트가 잘 팔릴까?" 했다. "욕심부리지 않으면 팔릴 터이니 걱정 마세요." 했다. 정말 한 달 만에 집이 팔렸다. 딸 하나 있는 젊은 부부가 집을 샀다.
집이란 살았던 사람의 기운과 살고자 하는 사람의 기운이 잘 맞으면 그만이다. 나보다 15살은 어려 보이는 부부는 눈이 빛나고 새 집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내가 이 집을 살 때의 모습을 보는듯해 좋았다. 아파트 전 주인도 딸 둘을 잘 키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우리 부부도 딸과 아들을 잘 키우고 이사를 하니 딸 하나의 젊은 부부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을 듯하다. 지금도 가끔 대전 월평동 누리아파트를 지나갈 때는 딸과 아들이 아파트 단지에 함박눈이 온날 신나게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택지 계약을 하자마자 대전 아파트는 팔렸다. 부랴부랴 군산 수송동에 전세 아파트를 마련했다. 택지가 2016년 봄에는 완성되니 집은 2016년 이후 지을 수 있게 됐고 남편은 분주했다.
대전집을 팔고 군산에 주택을 짓겠다 하니 어머니는 걱정이 컸다. "단독주택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아니? 다 가꿔야 하는데 힘들어서 관리를 잘하겠냐? 아파트야 모여 살고 관리비를 내니 관리가 되지만." 했다. 내가 "걱정 마세요. 손이 적당히 가게 하면 되죠. 조금만 심고 조금만 가꾸면 되지 않겠어요? " 했다. 어머니는 "야 도둑이 들면 정 떨어져서 못 산다. 무섭고, 그냥 아파트에 살지 집을 짓겠다고 그러냐!" 하며 두 분은 걱정을 앞세웠다.
택지를 계약한 후 남편은 인터넷 사이트로 집 짓기를 공부했다. 팔이라도 걷어붙이고 집을 지을 기세였다. 내가 집 짓기를 서칭(인터넷 서칭) 하지 말고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하래도 남편은 사람을 사서 본인이 집을 짓기라도 할 것처럼 온갖 정보를 알아봤다. 집 짓는 비용에서부터 업체에 맡기지 않고 집 짓는 사람들 얘기며, 집을 짓다 사기를 당한 얘기들과 집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비가 세고 화장실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얘기며, 냄새가 역류하는 얘기들, 전기를 절약하는 구조와 방법 등 너무도 많은 정보를 알아봤다. 남편은 비용을 최소화할 방법을 생각하는 듯했다. 무얼 하며 살 집인지를 생각하래도 얼마나 경비를 절약해서 지을지를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