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4: 딸이 뛰어놀던 친정집 마당
사과나무밭에 자리 잡은 빨간 벽돌 이층 집 첫겨울은 잊을 수 없다. 겨울을 맞아 기름보일러를 한참 돌려도 방바닥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아버지와 엄마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번갈아 지하실을 다녀왔다. 엄마는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데~. 처음이라 그런가?" 했다. 두 분은 거실 바닥에 손을 대고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내가 "아버지? 기름보일러 고장 났어요?"하고 물으니 아버지는 "아니 잘 돌아가~. 그런데 고장 난 게 아닌데 방이 뜨뜻미지근하네 참. 뭐가 잘못됐나~." 하셨다. 엄마는 "기름은 퍽퍽 주는데 방바닥이 미지근만 하니. 내원 참~"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아까운 기름이 쑥쑥 줄어드는데도 기와집 연탄보일러보다 방바닥 온도가 올라가지 않으니 당황해하셨다. 그 시절 기름은 관리만 잘하면 연탄가스 중독도 없고 번거롭지도 않으니 좋은 연료였지만 연탄보다 비싼 연료였다. 아버지가 거실 온도 세팅기를 들여다 보고 지하실 보일러를 오가며 부지런히 살펴보아도 방바닥 온도는 변화가 없었다. 돈이 더 들어도 엄마의 소소한 노동을 없애고, 연탄가스로 부터 안전한 집을, 버튼만 누르면 뜨거운 물이 꽐꽐 나오는 따스한 집을 상상하고 집을 지었지만 첫겨울에 아버지 계획은 산산 조각났다. 큰 기름통에 한가득 기름을 채워 겨울을 따스하게 보낼 것이라는 소소한 꿈은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며 사라졌다.
첫겨울 장롱에 있어야 할 담요들이 온 방에 펼쳐졌다. 보일러를 때고 한참 지나야 방바닥은 조금 따스해졌다. 아버지가 구들에 자갈을 넉넉히 넣은 것이 원인임을 나중에서야 깨달으신 듯 사과밭 이층 집에 사는 동안 겨울마다 엄마는 구시렁댔다. "네 아버지가 너무 넣더라. 자갈을... 인부들이 많이 넣으면 좋지 않다고 했는데..." 말을 꺾었지만 엄마는 혼잣말을 하듯 말을 내놨고 아버지는 헛헛 웃으시며 "집을 잘 지려고 그랬지, 많이 넣으면 보온이 잘 될 줄 알았지. 이렇게 미지근할 줄 알았나?" 했다.
내가 그때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은 아마추어는 전문가의 의견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집과 같은 구조물을 만들 때는 말이다. 아버지는 토건업의 한 복판에서 삶을 보냈지만 집 짓기의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분인데 과다한 의욕이 부른 착오였다.
사람은 더위도 적응하지만 추위도 적응한다. 집에 사람이 적응해야지 집이 사람에 어찌 적응하겠는가? 삼중 보온메리가 전국에 히트를 치던 시절이었다. 집안에 있어도 보온메리 내복에 겉옷을 단단히 입고 지냈다. 양말은 필수품이었다. 모두 그렇게 지냈기에 그게 당연해져 혹독한 추위가 들이닥치지 않는 한 그리 춥다 생각지 않았다. 허긴 그때 내 나이는 이십 대 초반이니 맨바닥에 잠을 자도 아침에 새싹처럼 일어날 나이긴 했다. 겨울에 조금 추웠지만 부모님의 새집은 좋았다.
빨간 이층 벽돌집은 사시사철 조용했다. 소리를 내는 일은 우리 형제들이 모여 부산하게 고기를 구워 먹거나 소소한 집안일을 부모님과 함께 할 때, 오래간만에 손님이 찾아와 누렁이가 격하게 짓을 때를 제외하면 절간 같았다. 특히 겨울엔 조용했다. 드넓은 과수원 구릉에 벽돌집만 각진 얼굴을 빠꼼이 내놓는 형국이었다. 사방에 눈이 쌓이면 집 주변은 고즈넉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던 시절이고 지금처럼 눈이 쌓이면 제설차량이 다니던 시절도 아니니 눈만 오시면 도로와 구릉이 온통 하얗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는 땀을 뻘뻘 흘리듯 절절매며 구릉을 올라갔다.
눈이 온 아침에는 엄마가 신는 장화를 신고 이층 베란다에 올랐다. 과수원의 구릉은 눈에 반사돼 보석처럼 빛났다. 요즘에야 스키장에 가서야 보는 광경을 겨울만 되면 일상으로 보았으니 참 좋은 시절이었다.
특히 첫 해 함박눈이 온 날은 잊을 수가 없다. 아침 눈을 뜨니 사방이 흰색이었다. 긴 구릉에 눈만 있고 새하얀 빛에 눈이 빛났다. 벌떡 일어나 장갑을 끼고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에 수분이 많아 작은 눈덩이는 그냥 굴리기만 해도 저절로 커졌다. 땀을 흘리며 눈사람을 만드는 나를 보고 엄마도 아버지도 "다 큰애가 참~" 했지만 거실 창문 앞에 커다랗게 만들어진 눈사람을 보곤 함께 웃었다. 뒤꼍 아궁이에서 숯 조각을 가져와 눈에 꽂고 사과나무 가지로 눈썹을 만들고 사과껍질로 입술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웃으며 "코는 어딨냐? 코를 달아야지." 했다. 내가 코를 달았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 눈사람은 며칠은 부모님의 눈앞에 얼쩡되었으니 워낙 크게 만들어 녹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결혼해 아파트에 살며 딸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나서야 신흥동 빨간 벽돌 이층 집이 추운 집임을 알았다. 겨울에 딸을 만나러 주말에 가면 엄마 아버지가 두툼한 점퍼를 입고 두 겹 담요를 깔고는 거실에 앉아 TV를 봤다. 딸이 네 살 즈음 단어로 이 말 저 말을 하던 겨울, 회사에 일이 많아 딸을 일주일 친정에 맡겨 놓고 주말 저녁에 친정집에 가니 딸이 달려와 내게 안기며 한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딸이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와 안겨 얼굴을 비비며 한마디 했다. "엄마! 펭귄, 펭귄이야. 할머니, 할아버지는~ 펭귄이야. 추운 남극에 사는 펭귄" 이라며 내게 얼굴을 드밀고 호하며 입김을 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겨울 보일러를 때도 집안 온도는 그리 올라가지 않아 딸의 동그랗게 오므려진 입술에선 입김이 파르르 났다.
엄마는 한껏 몸을 움츠리고 동물의 왕국을 보다 딸이 내 품에 안겨하는 말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내가 딸에게 "뭐 펭귄? 왜?" 하니 딸은 "추운 나라 펭귄 같잖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는." 했다. 엄마,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옷을 껴입고 앉아 있어 정말 펭귄 같았다. 아버지는 "허허 고것 봐라, 추울까 싶어 온도를 올렸는데 바로 가서 이르네.." 했고 엄마는 크게 웃었다. 딸의 펭귄 소리에 우리 모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네 아버지가 집을 튼튼하게 짓는다더니 구들에 자갈을 너무 넣어서 방이 뜨거워지지가 않는다." 했다. 아버지는 싱긋 웃으며 "그러게 욕심을 부려서 그리됐네." 했다.
딸이 놀이방을 다니고 내가 직장 생활을 할 때 주말이면 자주 딸을 데리고 친정엘 갔다. 딸이 친정에서 자란 것도 있지만 아버지는 딸과 노는 걸 좋아했다. 초여름 친정에 가니 아버지는 어른 팔뚝보다 굵은 사과나무가지에 두꺼운 밧줄로 그네를 만들어 놓고 손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네는 한 일 미터 삼십 센티되는 길이였고 딸 엉덩이가 넉넉히 들어가는 나무판자가 땅에서 40cm 정도 위에 매달려 있었다. 딸이 조르르 달려가 의자에 앉으니 아버지는 딸의 등을 살살 밀어줬다. 딸이 얼마나 까르르 거리며 웃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손녀 등을 밀며 "안 무섭냐? 더 세게 밀어줄까?" 했고 딸은 "안 무서워요. 재미있어요. 더 세게요. 할아버지" 했다. 나는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손녀 등을 미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내가 놀던 엄마의 사과나무밭이었다. 사과나무는 어린 나를 기억할까? 딸은 늙은 사과나무 그네를 타며 행복해했다.
몇 년 후 도로변을 따라 하나 둘 단독주택과 작은 상가 건물들이 지어지더니 집 남쪽에 도로가 났다. 남쪽과 서쪽 마당에 있던 사과나무는 도로로 마당이 수용되면서 모두 사라졌고 딸이 타던 작은 그네도 사라졌다. 남쪽으로 큰 도로가 나더니 집 앞으로 큰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이십여 년이 되니 사방이 아파트와 상가와 주택이 자리를 잡아 봄이면 가득했던 복숭아꽃, 사과꽃, 배꽃, 여름이면 주렁주렁 달리던 과일들이, 가을이면 나뭇잎이 물들던 고즈넉한 구릉의 과수원은 모두 사라졌다.
2016년 여름 집을 지을 업체를 알아봤다. 남편에게 집 짓는 업체를 알아보자니 업체는 안 알아보고 온갖 정보만을 펼쳐놨다. 계약을 잘못하면 집 뼈대만 져놓고 돈을 더 줘야 집을 짓겠다는 업자, 공사의 90%를 하곤 입주 날이 다가와도 돈을 내놔야 마무리를 한다는 업자, 땅만 파고는 도망간 업자, 입주를 하니 배선이 잘못돼 수리를 해달라 하니 수리는 별개라 하는 업자, 배관이 잘못돼 하수구가 막히거나 물이 새 집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수리만 하는 집주인 등등 너무 많은 사건사고를 강남 간 제비가 박씨 물고 오듯 저녁마다 밥상에 올렸다. 집을 짓자는 것인지, 짓지 말자는 것인지.... 그 많은 정보 중에 "집 참 쉽게 믿음직하게 지었어요." 하는 말은 없었다.
몇 개월 주택을 전문적으로 짓는 업체 홈페이지를 들여다봤다. 일주일에 몇 건의 계약이 체결되는지, 일주일에 몇 채의 집이 지어지는지, 지어진 사람들이 어떤 댓글을 다는지, 하자가 발생했을 때 어떤 시스템으로 처리가 되는지 들여다봤다. 몇 개월이 흘러도 홈페이지에 업그레이드 정보가 없는 업체도 있고 하루가 멀다 하게 새로운 주택 디자인과 시공사례가 있는 회사도 있었다. 내가 업체에 전화를 걸어 집을 지으려 하는데 어떤 과정을 밟는지 물으니 업체 사람의 첫 질문이 집 지을 위치가 어디이며 땅의 가격이 어떠 한가였다. 큰 그림에서 땅의 시세가 약한 곳에선 집의 구조 및 평당 가격을 높게 책정하지 않는 것이 위험을 최소로 하며 단독주택을 짓는 것이며 가능한 많은 쇼룸을 다녀보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자신들의 쇼룸 위치를 알려주며 구체적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최선이라 했다.
남편에게 대략 세 개의 업체를 링크해 주었지만 남편은 시큰둥했다. 남편의 주요 고민은 큰 업체에 하면 프로세스는 편안하나 기본 비용이 올라간다는 것이고 작은 업체에 하면 기본 비용을 절약할 수 있지만 그만큼 업체 리스크을 안고 간다는 점이었다. 몇천만 원이 절약되거나 쓰이거나 해야 하는 상황에 결정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했다. 늘 그렇듯 사람들이 하는 일은 오류가 있다. 실수도 있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류와 문제 발생을 시스템으로 해결하는 구조를 회사가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작은 물건 하나 사는 문제가 아니라 집을 짓는 문제라면 최상을 생각할 것이 아닌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악의 사태를 시스템으로 보상하려는 회사는 기본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AS는 기본 비용을 발생 시키나 AS를 고려하는 업체는 문제를 최소로 줄이기 위해 명료한 시스템 속에서 작업하게 됨을 쉽게 간과해선 안된다. 제비가 박씨 물고 오듯 수많은 남편 정보를 종합해 최종 업체 선정 기준을 잡았다.
2016년 한여름에 용인의 쇼룸에 올라가자 했다. 2017년 9월 30일 아파트 전세계약이 끝나니 그때 들어가려면 늦봄엔 공사가 시작돼야 해서 방학에 아들과 셋이서 업체에 예약을 잡아놓고 무조건 올라갔다.
집은 80평대와 60평대 두 집이 지어져 있었고 다양한 부자재 쇼룸이 있었다. 전시로 지은 집은 화려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집 평수는 넓었지만 구조가 복잡하여 협소한 느낌이 들었고 제법 방들은 컸지만 상대적으로 공유공간이 좁았다. 부엌 자재며 거실 자재는 세련된 것들로 마감되어 있었지만 조금 산만했다. 상담을 하며 집 짓는 과정을 들으니 "도면 설계를 하고(기본 3차 수정), 설계가 결정되면 3D 구조로 집 외장재를 결정하고(기본 3차 수정), 집 외장재 결정 후는 집 내부의 인테리어(인테리어 초안을 PPT로 받은 후 이삼주 후에 서울 사무소에서 모든 인테리어 자료를 보며 결정)를 결정한다." 했다. 그 이후 우리가 결정한 구조에 내 외장 부자재 BOM(bill of material) 가격에 노무비가 합쳐져 최종 집 짓는 가격이 산정됨으로 결국 가격은 도면 설계, 내외장재 선호도로부터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절약해 짓고자 하면 평수를 낮추고 내외장재를 값싼 것으로 대체하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집 짓는 가격은 치솟을 수밖에 없으니 총 소요비용에 대한 마음의 결정이 가장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