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은 며느리 14: 코로나 19가 추석을 바꾸다니
2주 전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수업 준비를 하다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가 "추석 어떻게 할 생각이니?"하고 물었다. 남편이 추석 전날 당직이라 추석날 아침 함께 올라가자 얘기해 논 뒤였기에 "어머니, 애 아빠가 전날 당직이라 추석날 아침에 올라갈게요." 했다. 어머님은 "당직이 전날이구나." 하시며 말에 시간을 들였다. 의중을 모르니 핸드폰을 들고 기다렸다. 어머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얘~ 이번 추석은 올라오지 마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다 조심하라는데 뭘 올라오니. 둘째(고3) 데리고 잘 먹이고 산책하면서 쉬게 해라. 올라오느라 고생하고 내려가느라 고생하지 말고." 하셨다. 군산에 사니 천안 어머니 댁에 올라가는 길은 고생이랄 것도 없는데 고생이란 단어를 반복하시며 오지 말라 했다. "조심해서 천천히 올라갈게요. 그냥 성묘만 하고 집에만 있으면 되는데요." 했다. 어머니는 "뭐하러 오냐. TV에서 맨날 움직이지 말라하는데. 오지 마라." 했다.
하루 종일 TV 앞에 계신 어머니 모습이 잠시 뇌리에 스쳤다. 아침 드라마를 봐야 하니 아침밥은 작은 쟁반에 받쳐 TV 앞에서 드실 것이고, 늦은 점심을 드신 후 오후 내내 드라마와 트로트, 가요, 가곡 채널을 넘나들며 소파에 앉아 노래 부르는 어머니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노래와 드라마 사이사이 뉴스를 보며 정부의 대국민 호소를 얼마나 반복해 들었으면 그리 단호하게 오지 말라는 것인지. 잠시 머리를 흔들고 내가 "어머니, 가도 돼요. 저흰 올라가려 계획했는걸요." 했더니 어머니는 만사 귀찮다는 듯 "오지 마라. 세상 이리 시끄럽고 못된 병이 창궐하니 그냥 둘째 데리고 잘 쉬렴." 했다. 엉겁결에 "네~. 그럼 그럴게요." 했다. 정말 엉겁결이었다. 남편 당직 일정이 꼬이면 내려오실망정 얼굴 보지 않고 지나간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가 추석을 각자 알아서 보내자 하니 당황스러웠다.
전화를 끊고도 믿기지 않았다. 늘 시장을 봐서 전과 튀김을 하고, 갈비를 재우고 선물을 사들고 올라갔는데 오지 말라하니 머리가 순간 텅 빈 듯했다.
결혼 후 9년 되었을까 설에 올라가니 시아버지가 장손 조카와 감정을 상하는 일이 있었다 했다. 크게 속상해 하셨다. 시아버지는 "돌아오는 추석 명절은 우리끼리 보내자." 하셨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절 때 나는 우리 가족 먹을 음식을 했고 명절 당일에는 큰집에 가 차례상 상차림을 돕고, 상을 치우고 ,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돌아왔기에 명절 자체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큰집 발을 끊는다니 어찌 시간을 보낼지 궁금했다. 추석에 올라가니 시아버지는 명절 분위기가 안 난다며 시어머니를 보고 다섯째 아들인 당신이 추석 차례를 지내면 어떻겠냐 했다. 어머니는 우물쭈물하다 눈이 왕방울만 해져서는 "뭔 차례를 여기서 지낸다고 그래요? 당신은 하여튼 말도 안 되는 소리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해." 했다.
다섯째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명절 준비를 독자적으로 해본 적도 없는 데다 늘 참가하는데 의의를 찾으며 명절을 보내셨었다. 그러니 아버님의 말은 어머니 발끝에도 닿지 않을 말이었다. 어머니는 장손이었던 큰집 세 조카며느리가 음식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어머니와 아버님은 당일 아침 술과 봉투를 준비해 차례 시간 전 큰 조카집에 도착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 결혼 후엔 며느리인 내가 가서 도우라 하시며 딱 맞춰가던 시간을 한 시간 가량 앞서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가 평생 교편생활을 하였으니 주부였던 손윗동서들이 웬만한 일들은 다 했었기에 어머니는 시부모님이 살아생전에도 음식 할 생각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 어머니는 상차림 음식을 할 줄 몰랐는데 그걸 시아버지가 큰 조카와 감정이 상했다 하여 상을 차리라 하니 펄적 뛸 노릇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어머니 입장에선 기가 찬 말이었다. 어머니는 되지도 않는 소리라 하였지만 아버님은 "당신이 차례상을 차릴 줄이나 알아? 일을 해봤어야지 알지." 하니 어머니는 "내가 다섯짼데 왜 차례상을 차려. 그 많은 재산은 다 형님이 챙겨갖고 왜 내가 일을 해?" 하며 콧바람을 쌩 불었다.
시아버지는 "맘에 안 들어서 그러지. 상차림도 그렇고, 걔들 얼굴도 보기 싫고" 했다. 어머니는 "장손이 재산 다 받아서 그렇게 차리는걸 뭐라 해. 그걸 탓해서 나보고 차례상을 보라는 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니 참." 하며 어머님은 시아버지의 말을 받아 구시렁대었다.
나는 차와 과일을 준비하다 시부모님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이 나왔다. 조만간 나보고 전과 나물을 무쳐 가져 가라는 말이 떨어질 것이 눈에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내간 나를 보며 시아버지가 "네가 내년부터는 가서 음식 해라. 얘들도 그렇지 보고 배우는 것이 있어야지." 했다.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며 "왜 쟤한테 가서 음식을 하래? 그 집 며느리가 셋이고만, 왜 쟤가 가서 해! 쟤가 뭐 받은 거라도 있어? 당신 참 우습네." 했다. 시아버지는 "아니 당신은 부모한테 뭐 받아야 일을 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 했다.
시아버지 의중이 읽혔다. 차례상을 차려보지도 않은 시어머니 밑에서 큰집 발길을 끊으면 못 배운 내가 어찌 부모 차례상이며 제사상을 차릴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를 훈련시키려니 '차례를 가져와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부터 당신들은 감정이 상했으니 '며느리만이라도 보내야 하나' 이런 궁리를 하신 게다. 그분들은 나를 잘 모른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내가 자라며 얼마나 많은 차례상과 제사상을 엄마를 도와, 할머니를 도와, 큰엄마를 도와 차렸는지.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앉아 수많은 전을 어찌 부쳤는지 그분들이 모르시니 말이다.
시부모님이 큰 소리를 내며 싸우는 소리를 듣다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버님! 아버님이 부모께 효도하겠다는 마음은 알겠는데요. 어느 집이 자식마다 차례를 각자 드려요. 장손이 있고 장손이 상을 차리면 잘하건 못하건 그건 장손 몫이죠. 그걸 아버님이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죠. 아버님이 장손이 아니시잖아요. 그 집에서 차례를 안 지내고 아버님에게 공식적으로 주면 몰라도 그건 예법에 어긋나죠. 기분이 상하셨어도 참석하셔야죠. 아니면 할 수 없지만요." 했다. 어머니는 "나는 그 집구석 안 간다. 당신 부모니까 당신이나 가던지." 했다. 나는 시아버지께 "추석 명절 분위기를 내고 싶다 하시니 제가 전을 부칠게요. 차례상에 올리는 전은 제가 다 부쳐드릴게요. 아이들에게도 가르치고. 기름 냄새 가득 맡으며 명절 분위기 나게 제가 할게요. 그런데 차례를 가져올 수는 없어요. 그건 배운자식 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했다. 아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너 참 말 잘한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장손이 장손 일을 하는 거지. 왜 차례를 가져와. 그래 네 말대로 전 부치며 얘들과 추석 분위기나 내자." 했다. 그렇게 해서 차례도 지내지 않으며 나의 전 부치기는 시작됐다.
15년간 전을 부쳤다. 차례상도 아닌 먹을 상을 위해. 시아버지의 걱정을 덜기 위해 말이다.
추석이나 설이 되면 아이들은 손을 씻고 부엌에서 나를 도왔다. 아들은 잔 심부름과 부칠 전에 밀가루를 입혔고, 딸은 계란을 입혔고, 남편은 당직 일정으로 있던지, 없던지 했다. 천안에서 한 8년 전을 부치니 시아버지, 어머니가 "하루 종일 기름 냄새에 머리 아프다."며 "죽겠다." 하셨다. 그 뒤로는 대전집이나 군산 집에서 아이들과 셋이서 전을 부쳐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남편은 "그냥 두 세 가지만 해, 뭘 그렇게 이것저것 해. 튀김은 하지마." 했다. 음식도 할 때 하는 것임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전과 튀김은 냉동실에 잘 보관하여 놓았다 반찬으로 혹은 샐러드에 넣어 먹으면 참 좋다. 딸이 "엄마~ 너무 많아요. 그냥 조금 하면 안 돼요?" 하기에 내가 "마트에서 냉동식품 사잖아. 냉동식품 만드는 거라 생각해." 했다. 정말 그랬다. 전을 부쳐 냉동실에 넣어두고 프라이팬에 데워먹으면 참 맛나다. 요즘은 에어 프라기에 넣어 돌리면 기름도 쏙 빠지고 너무 맛나다.
난 알고 있다. 시아버지는 혹 내가 제사상을 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는 것을 말이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차례상과 제사상을 당신 아내의 손으로 얻어먹긴 어렵다 생각되니 어떻게라도 제대로 된 차례상 음식을 만들게 하고 싶었음을 말이다. 돌아가신 후는 미래의 일이다. 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마음에 평화를 드리는 일이 먼저였다.
그렇게 전 부치기를 한 지 15년! 오늘 공식적으로 휴가를 가졌다. 미국연수 기간에도 추석에는 전을 부쳤다. 옆집과 나눠먹으려. 그러니 정말 휴가다. 너무 좋다! 이 자유가.
너무 행복하다. 지금 한참 전을 부치고 기운이 쏙 빠져 저녁은 매운 짬뽕을 먹거나 매운 떡볶기를 먹으며 퉁퉁 부은 다리와 하루 종일 기름 냄새에 찌든 내 폐을 신선한 공기와 칼칼한 음식으로 챙겨줘야 할 시간일 터였으니.. 코로나 19가 세상을 단숨에 잠시 변하게 했다. 잠시....
어제 저녁 고3 아들을 익산 학교에서 데리고 와 저녁을 먹고 은파호수를 걸었다. 호수를 찬찬이 걷던 남편이 "내일 전을 얼마나 부칠 거야?" 물었다. 내가 "전을 부쳐? 왜? 내가? 전 안 부쳐. 그냥 놀 거야." 했다. 남편이 잠시 당황하더니 "그럼 뭘 먹어?" 하기에 "경제도 어렵다 하고 작은 식당들이 힘들다 하니 사 먹지" 했다. 아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호숫길을 걸었다. 호수를 걸으며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는 아들과 통화를 하고, 손자와 통화를 한 후 나와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잘 지내신다며 걱정 말라하신다.
시어머니가 전화로 "00이(손자 이름:손자 이름을 말할 땐 꿀이 떨어진다) 추석에 잘 먹여라." 신신당부를 했다. 고3인데 잘 먹고 잘 쉬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도록 네가 잘 하라 하셨다. 남편은 아들이 가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지 하며 아들을 보고, 목소리 톤이 높아 함께 걷던 아들이 그 당부의 말을 듣고는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화를 끊고 아들 등을 쓰다듬으니 아들은 "사 먹어요. 그냥." 했다. 추석 전날인 오늘, 아침은 가볍게 바게트와 달걀프라이와 베이컨을 먹고 점심에 해장국을 사 먹었다. 아들과 남편과 함께 장을 봤다. 저녁에 LA갈비 재운 것을 해주니 아들은 밥 한 그릇 뚝딱 비웠다. 맛난 전을 해주진 못했지만 갈비니 어머니도 잘했다 하실 듯하다.
추석과 설의 차례상은 관계의 예다.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자식과 앞으로 살아갈 미래 자손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예의 장 말이다. 음식을 잘하고 못하고는 부수적이다. 그러니 어떤 음식을 올리는가는 더욱 부수적이다. 상을 차리고 안 차리고의 문제도 아니다. 부모로부터 얻은 삶에 대한 감사와 피의 혈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상생하며 살라는 뜻을 헤아리는 장이다. 그게 첫 번째다. 한해를 건강하게 시작하여 무탈하게 추수(벌어먹고 살아온)하며 살아온 축하가 두 번째요. 종적 삶의 괴적을 바라보며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무한함을 동시에 느끼는, 그리하여 진정한 내 존재를 인식하는 장. 그것이 세 번째다. 더 많은 이유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명절이니 추석은 참 좋은 관계와 예의 장이다.
올해는 더 좋다. 왜? 편안해서다. 이리 시간을 내어 추석을 생각하니 말이다. 기름 냄새 없는 추석! 둥근달을 보며 부모님을, 형제들을, 내 가족을, 내 존재를 생각하니 그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