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살 땐 평생 운전은 하지 않을 거야, 란 다짐이 별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서귀포 외곽에 살며 운전을 하지 못하는 일은 꽤 불편했다. 이동할 땐 언제나 N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주위 친구들이 하나둘 차를 사고 운전을 하게 되자 나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곧 한쪽 눈이 불편한 시간이 왔고 자연스레 운전은 내가 할 수 없는 일, 내 일이 아닌 일이 되었다. N이 육지에 간지 2주 차, 몇 번 가까운 마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가 필요한 것들을 사 왔다. 그제는 제법 거리가 먼 시내까지 다녀왔다. 오는 길에 분위기 좋고 책도 볼 수 있는 B 카페에 들러 아니 에르노의 책을 살 생각이라 더 신이 났다.
평화롭고 맑은 날이었다. 안고 가는 햇빛이 너무 뜨거워 모자와 선글라스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흠이었지만 신나는 라이딩이었다. 가는 길에 기분 내며 기어를 2단 3단까지 올리며 씽씽 달렸더니, 전기 자전거의 배터리가 순식간에 30%로 줄어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깜짝 놀라 마음이 졸아들었다. 집까지 내 힘으로 갈 자신은 없는데, 도중에 완전히 지칠 텐데, 여기서 돌아가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될 정도였다. 얼른 원래대로 1단으로 낮춰 신중하게 달렸다. 봉봉이 먹을 닭가슴살도 사고, 같이 먹을 달걀도 사고, 포도와 라면도 샀다.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다시 전원을 켜자 배터리가 40%로 조금 올라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B 카페에 들렀다.
'오늘은 커피 말고 책 보러 왔어요' 하며 들어섰는데 마침 홀로 계시던 주인분께서 아니 에르노 책을 손에 가득 쥐고 진열 중이셨다. 책 제목을 얘기하자 본인도 읽고 있었다 하시며 카운터에서 <세월>을 찾아주신다. 1984BOOKS의 책이 지금 디자인으로 바뀌기 전 세로 길이가 약간 짧은 예전 판형이다. 여기서 읽을 거면 그 책을 보시고, 사 가실 거면 새로 나온 책을 사세요, 하신다. 읽다 보니 전쟁 끝난 우리나라 얘기, 내 얘기처럼, 우리들이 살아온 세월과 별반 다를 게 없더란 얘기를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사진과 영화를 좋아하시는 주인장은 아니 에르노의 책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레벤느망> 영화 보신 이야길 해주신다. 영화가 사실적이어서 상당히 끔찍했단 말씀도.
구입하진 않았지만, 얇은 <사건>이란 책을 읽을 자신이 있는지 혹은 영화를 볼 자신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예전엔 방을 너무 사실적으로 비추는 형광등 불빛조차 싫었는데, 지금 내 방엔 형광등 세 개를 끼워둔 조명이 하얗게 켜져 있다. 환한 대낮도 이젠 좋다. 자궁근종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끝내 자궁을 적출했는데, 그때마다 맞닥뜨린 섬뜩한 두려움, (물론 수술 중엔 마취해서 잠들어 있었겠지만) 환한 수술대 위에서 벌어졌을 일들과 드러내고 싶지 않아 덮어둔 어린 시절의 크고 작은 사건들, 상처들을 소환하는 아니 에르노의 얇은 그 책을 나는 반드시 읽게 될 것만 같았다.
앉아서 책만 읽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예요, 이렇게 활짝 문을 열어둘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잖아요, 란 말씀에 주위를 둘러보니 두 개의 건물로 이어진 카페의 모든 창과, 병풍처럼 접으면 한쪽 벽면이 완전히 개방되는 두 건물의 마주 보는 큰 문들이 활짝 열려 있다. 서 있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대화를 끝내기가 아쉬웠는지 주인께서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 하시며 전기주전자에 전원을 켜신다. 죄송하지만, 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내가 더듬더듬 손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봉봉이가 집에 혼자 있어서요, 시내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 얼른 가봐야 해서. 2년 전에 심한 발작이 있고 아팠던 후로는 혼자 두면 마음이 불편해요, 곧 봉봉이랑 같이 올게요.라고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 집 커피가 맛있는데, 아무래도 마시고 올 걸 그랬나, 서너 번은 생각했지만 꼬리 치며 격하게 반가워하는 봉봉이를 보자 금세 맘이 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