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백 tea,bag

by Soopsum숲섬


차 한 잔이 나에게 오기까지 참 많은 이들이 수고해 주었구나, 티백이나 차를 꺼내는 순간 드는 생각이다. 누군가 내려준 커피나 인스턴트커피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작은 꾸러미 안에 든 차가, 끓고 있던 기운을 살짝 내려놓은 물과 만나면 천천히 제 고유한 색감과 향을 되찾으며 우러나기 시작한다. 갇혀있던 시간이 찬찬히 풀려나는 것처럼. 티백은 차의 기억이 담긴 작은 주머니다.


차나무가 자라며 맞은 태양과 바람과 비와 흙의 기운이, 이웃한 생명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찻잎에 새겨진다. 수확되어 덖이고 말려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드는 이들의 에너지가 스며든다. 햇차, 라는 싱그럽고 풋풋한 느낌만큼이나 오래된 차의 묵직한 무게감과 향도 좋다.


어느 해 남의 동네 포구에 갔다가 희고 아담한 찻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순전히 집이 예쁘고 궁금해서였다. 우리가 무슨 차를 마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분명 커피였을 것이다. N은 자기도 이만큼 작은 가게를 했던 시절 저기 보이는 다락방처럼 생긴 좁은 공간에 올라가 잠을 잤다고 추억했다). 그러다 주인과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끼던 말이 죽었다는 사연을 들었다. 그녀는 산책길에 따서 직접 만들었다며 작은 병에 감국차甘菊茶를 담아주었다. 이듬해부터 산책길에 조금씩 국화를 따와 차를 만들었다. 해변에 핀 작은 감국만 보면 그날의 그녀가 생각나고 잘 지낼까 궁금해졌다.


티백 하나를 꺼내면 어쩐지 아까운 생각이 들어 한번 더 우려야지, 하며 종지에 담아두기도 했지만 다시 우린 적은 드물었다. 이제는 우러나는 티백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 오직 한번뿐이야, 이렇게 한번 만나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지금 마지막 남은 카카오 티백을 우려 차를 마시고 있다. 초콜릿 사업을 하는 친구의 친구가 만든 것인데 그들은 요즘 평안한지 묻고 싶어 진다.


가방 속에, 주머니 속에 많고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지만, 그중 차와 편지처럼 만드는 이와 펼치는 이를 충만하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아, 그런 속성을 가진 것 중에 시가 있다. 천천히 자세히 보면 볼수록 읽어지고 해독되는 생의 비밀들. 여러 번 읽을수록 행간은 넓어지고 눈은 깊어진다. 악보 역시 읽어주는 이, 연주하는 이가 있어야만 음악으로 살아난다. 요즘은 영상이나 음원을 통해 쉽게 음악을 듣지만, 예전엔 오직 누군가의 연주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음악을 들으며 연주하는 이를 생각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차와 시와 편지와 악보들은 언제든 펼쳐볼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만들어져 기어이 우리들 앞에 도착한 신비로운 선물꾸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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