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에 눕다 #9

<책이 입은 옷> 中, 줌파 라히리 / '표지와 동사에 대한 명상'

by Soopsum숲섬


"난 어릴 적 많은 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도서관에 자주 갔는데, 도서관 책들은 종종 벗겨져 있었다. 재킷이 없었고 어떤 이미지도 없었다. 딱딱한 표지에 종이 낱장들이 묶여 있을 뿐이었다. (…)

(…) 그 책에는 날개에 내용이 요약되어 있지도, 작가의 사진이 실려 있지도 않았다.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었고 모든 것이 비밀스러웠다. 그 무엇도 먼저 드러내지 않았다. 책을 알려면 책을 읽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날 사로잡았던 작가들은 그들의 말로만 자신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표지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시장이나 현실을 모른 채 내 첫 독서는 시간 밖에서 행해졌다.

(…) 발가벗은 책의 침묵, 그 미스터리가 그립다. 보조해주는 자료가 없는 외로운 책 말이다. 예상할 수 없고 참조할 것 없는 자유로운 독서를 가능케 하는 미스터리. 발가벗은 책도 스스로 설 힘이 있다."


-《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이승수 옮김. 마음산책(2017) 47~49쪽



12월이다. 늘 12월이 오기 전 새해 플래너를 장만했고 한 달 먼저 새해와 새 마음은 시작되었다가 봄이 오기 전 흐지부지 흩어지곤 했다. 올해는 플래너를 사지 않았다. 5년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첫해이다. 5년 동안 무얼 해보자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하지 않고 내 페이스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보니 내년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빼곡하다.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더 정확히는 책 표지를 보다 보니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다"라는 줌파 라히리의 문장을 옮겨야만 했다. 그녀에 따르면 '책의 표지는 책이 입는 첫 번째 옷이며 첫 번째 시각적 해석, 출판사의 견해와 갈망이 담긴 홍보용 해석이며, 작가와 독자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며 작가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히기도 하기 때문'이다.(옮긴이의 말, 90쪽)


최근 읽은 책의 대부분은 책의 표지나 인터넷상에 적힌 서평의 문장들, 추천사 등 타인의 말을 통해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책의 표지마저 제대로 만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들을 살펴보고 만져보고 읽어보며 작가의 말에 이끌려 책을 고른 것이 무척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간, 시간이 언제나 문제일까. 내겐 정말 그토록 시간이 없을까.


'가면'과 '화장'을 벗고, 지나치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을 벗고, 책의 표지를 벗기고, 본질을 만나고 싶다. 책을 읽을 때 저자를 만나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내가 행하는 모든 동사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먹고 있는 것, 바라보고 있는 것, 만나고 싶은 것과 하고 있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줌파 라히리는 자신이 겪어온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작가로서 느낀 책과 시장과의 관계와 문제점 등을 엮어 담백한 에세이로 풀어냈다. 얇고 가벼운 책이지만 책 표지에 대해 또 새로 맞는 새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글을 읽는 때만큼은 저자와 함께 꿈꾸고 싶다. 더불어 내 꿈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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