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의 중요성 그리고 좌절하지 않는 용기
미 정부 급할 때마다 SOS…위기 관리 탁월 ‘월가 해결사’
[월스트리트 리더십]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알라딘’ 플랫폼 도입 등 철저한 리스크 관리로 명성을 쌓은 래리 핑크는 월가의 해결사로도 불린다.
[로이터=연합뉴스]
2008년 3월, 제이피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파산 위기에 몰린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장애물은 베어스턴스의 모기지 관련 자산. 요동치는 시장에다 구조도 복잡해 인수 가격 산정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때 다이먼이 ‘SOS’를 요청한 인물이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었다. 핑크는 회사의 전문가들을 급파해 다이먼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그런데 핑크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티머시 가이트너 당시 뉴욕 연준 총재가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고, 이후 블랙록은 베어스턴스 매각 조건에 따라 뉴욕 연준이 떠안게 된 부실 자산(300억 달러)의 관리를 책임지게 된다.
핑크는 이렇듯 ‘월가의 해결사’로 통한다. 위기 때마다 민간 금융회사는 물론 미국 정부까지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종종 실질적인 관여를 요청한다. 특히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미국 정부의 ‘월가 구출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다. 베어스턴스와 보험사 AIG 등 정부 구제 금융을 받은 회사들이 연준에 넘긴 부실 자산에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모기지 업체 패니메이·프레디맥의 자산, 그리고 연준이 시장에서 직접 사들인 모기지 채권까지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급 자산들을 블랙록이 도맡아 관리한 것이다.
블랙록의 경쟁사 뱅가드도 ‘알라딘’ 고객
이처럼 핑크가 누리는 막강한 위상의 배경엔 블랙록의 핵심 역량이 자리 잡고 있다. 또 이 역량으로 일궈 낸 블랙록의 거대한 자산 규모는 핑크의 영향력을 증폭시킨다. 그것은 ‘리스크 관리 역량’이다. 1988년 블랙록을 설립한 후 지금까지 최우선에 두고 꾸준히 투자하며 개선해온 역량이다. 자산의 가치 변동을 초래하는 요인들을 파악하고 시나리오별로 분석해 대비하는 일련의 투자 활동에서 블랙록은 탁월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블랙록이 이와 같은 경쟁력을 갖추게 된 데는 핑크의 철두철미한 리스크관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리스크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다”고 토로할 정도로 불확실성을 경계한다. 돈을 벌면 왜 버는지, 돈을 잃으면 왜 잃는지 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블랙록의 성공 DNA라고 할 이 까다로운 리스크관이 생겨난 배경은 예사롭지 않았다. 핑크가 지금껏 인생 최대의 실패라고 여기는 30여 년 전의 사건이 그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1976년 월가 투자은행 퍼스트보스톤에 입사한 핑크는 이른바 스타 트레이더로 급부상했다. 당시 걸음마 단계이던 모기지 채권 거래로 회사에 막대한 수익을 안기면서다. 성공 비결은 초보적이지만 남들보다 앞서 컴퓨터를 활용한 데 있었다. 수많은 모기지를 엮어 증권화하는 모기지 채권의 특성상 단순한 계산으로 거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이를 컴퓨터의 힘을 빌려 해결한 것이었다. 덕분에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회사 역사상 최연소 임원이 되는 영예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핑크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1986년의 일이었다.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인지라 귀신같이 시장을 예측해 수익을 올리던 핑크의 팀이 손실을 내기 시작했다. 물론 금리 예측이 틀린 탓이 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리스크 관리에 있었다. 막상 손실이 불어나자 그동안 놓치고 있던 리스크 요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 해 2분기에는 손실 규모가 무려 1억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재무적 성과가 곧 인격이라고 여겨지는 월가에서 스타 트레이더 핑크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더욱이 리스크 관리가 의심받자 이전의 수익은 중요치 않았다. 그때부터 좌천성 인사를 포함한 치욕적인 처우가 이어졌고, 결국 1988년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설립한 회사가 블랙록이었으니, 핑크가 회사를 경영하면서 리스크 관리에 그토록 집착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핑크는 특히 채권을 중심으로 컴퓨터를 비롯한 기술력 투자에 집중했다. 일찍이 모기지 채권 거래에서 컴퓨터의 가치를 경험한 데다, 궁극의 리스크 관리를 위해선 그에 걸맞은 컴퓨팅 파워를 갖추는 게 필수였다.
핑크의 리스크관과 고도의 기술력이 결합한 결정체가 ‘알라딘(Aladdin: Asset Liability & Debt & Derivatives Investment Network)’이다. 핑크는 블랙록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리스크 관리 플랫폼 알라딘을 2000년부터 아예 별도의 사업부로 독립시켰다. 이후 고객들이 자산 관리를 위해 블랙록에 수수료를 지급하고 사용하는 단독 상품이 됐다.
우리의 일상에서 애플의 아이폰이 그렇듯 알라딘은 연기금·자산운용사 등 자산관리 업계의 생태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세계 225개 기관이 알라딘으로 총 18조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한다(2019년 말 기준). 모건스탠리·UBS 등 대형 자산운용사와 함께 미국 2대 연기금 캘리포니아주 교사 퇴직연금(CalSTRS), 그리고 블랙록의 최대 경쟁사인 뱅가드까지 알라딘의 고객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핑크가 내다본 투자의 미래에서도 기술력이 중심에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규칙에 기반하고 데이터가 주도하는 투자가 그가 예전부터 그려온 투자의 미래상이었다.
이에 핑크는 알라딘으로 축적한 기술력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신사업으로 상장지수펀드(ETF)를 선택했다. 수차례의 인수·합병으로 블랙록의 덩치를 키워온 핑크는 이번에도 같은 전략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2009년 ETF 브랜드 ‘iShares’로 유명한 자산운용사 바클레이즈 글로벌 인베스터즈를 인수한 것이다.
ETF 운용사 인수, 미래 내다본 ‘신의 한수’
금융위기의 와중에 내린 이 결단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핑크가 예측한 투자의 미래가 현실이 되자 ETF 시장은 급성장했고, 블랙록은 후발 주자임에도 세계 ETF 운용사 중 자산 규모, 종목 수, 매출 등 여러 방면에서 1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룬 핑크도 걱정거리는 있다. 그가 블랙록을 경영하는 데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기도 한 이것은 바로 중도를 지키는 일이다. 월가에서 블랙록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가 사업에 플러스 요인이자 동시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 있는 까닭에서다.
여러 차례 공적 자산을 관리하며 형성된 친정부 이미지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라는 지위는 블랙록의 정보력에 대한 신뢰로 이어져 영업 활동에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블랙록이 이해상충과 대마불사의 우려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결국 핑크는 금융위기 이후 은행권에 집중된 고강도 규제의 칼날이 블랙록을 향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0.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