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속 낀 세대‘의 비애

내 안의 꼰대를 발견하다.

by 정남이


최근 팀장의 불만스러운 피드백을 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한동안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괴감이 몰려왔다.


억울했다. 그중에는 후배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 게 주가 되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을 느꼈다.

대한민국 3040 중간 관리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선장은 배를 몰기 위해, 휘황찬란한 미래를 외치지만, 노를 젓는 선원들은 당장 눈앞의 파도만 본다.

그 사이에서 선장의 고함과 선원의 불평을 모두 듣고 조율하는 것, 선장과 선원의 간극을 줄이는 게 중간 관리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팀장과 팀원들 사이에 경험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도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중간마다 부연 설명과 함께 피드백이 중요한데, 그럴 때마다 먼저. 터져버릴 것 같을 때가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의 전환>

가장 힘든 건 ‘무책임한 지시’가 내려올 때다.


우리 모두는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됐는지 여부는 결과의 윤곽 정도가 나왔을 때야 파악이 가능하기에, 최초에 시작할 때는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무턱대고 일단 해보라는 상사의 지시는 답답함이 배가 된다.

‘아님 말고’ 식의 지시는 너무나 당연했기에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후배 사원들은 길을 잃기 쉽다.

그럴 때마다 중간에서 몇 가지 세부사항에 대해 티칭하고 뒷수습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프로젝트의 일정을 무리하게 당기거나, 말도 안 되는 성과 목표를 설정할 때면, 중간에 낀 사람으로서 숨이 막힌다.

지시를 하는 사람도 힘들겠지만, 받는 사람도 구체화하는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 안의 꼰대를 발견하다>

문제는 이 스트레스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후배 사원에게 업무 지시를 했다가 결과물이 너무 늦어 지적한 적이 있다.


“이게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 후배는 업무가 밀려 있었다는 나름의 이유를 댔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참에 주도적으로 일하지 않던 태도까지 같이 지적을 했다. 후배의 표정은 썩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나 또한 상사가 시키는 요구사항을 후배에게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내 기준’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 후배에게 쏟아낸 것이다.

거울을 봤을 때 그토록 싫어하던 꼰대 상사 중에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나 또한 가해자였던 것이다.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불행은 '만족'을 모르는 데서 온다>

내 마음 밑바닥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었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는 '결핍',

이렇게 힘들게 구르는데 후배들은 편해 보인다는 '시기심' 말이다.


가장 큰 불행은 만족을 모르는 것이니.
더 얻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다.
만족함을 아는 자는 언제나 만족하며 살게 된다.
- 도덕경-


노자의 말처럼,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사보다 권력이 없어서 불행했고, 후배보다 여유가 없어서 화가 났다.

현재 가진 것을 보지 않고, 남이 가진 것만 바라보니 마음속에 불이 생긴 것이다.




<남을 바꾸려는 욕망을 버리다>

회사 사람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건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상사가 바뀌거나, 후배가 원하는 성과를 만들어 낸다는 건 욕심이었다.


중간 관리자의 고통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비교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업무적으로 인정받는 동료를 보며 시기하거나, 부족한 동료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감정 소모를 멈춰야 한다.


대신 그 에너지를 ‘나’를 바꾸는데 써야 한다.

상사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능력을 기르고, 후배가 답답하게 굴면 ‘코칭’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들이 바뀌기보다 내가 바뀌는 게 빠르다.

아니, 나부터가 바뀌어야만 비로소 그들도 바뀐다.

이것이 이 구조 속에서 찾은 생존법이자, 생산자로서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