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회사 후기 쪄드립니다
처음 연구원에 임용되던 날을 돌이켜보자면 박사님(연구위원)들에게 인사를 다녔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시작은 서울이었다.
2019년 10월
새벽 다섯 시에 기상해 샤워를 하고 (지금은 더 이상 하지 않는) 화장을 곱게 한 뒤 대충 끼니를 때우고 나니 여섯 시를 간신히 넘겼다. 곧장 아버지 차에 올라 사당역으로 배달되었다. 초겨울이라 하늘은 이제 막 해가 뜰 것처럼 시퍼렇다. 사당역 국민은행 앞에 내려보니 나보다 한참 위로 보이는 어른들이 서성이고 있다. 그들 틈에 잘 섞여 처음이 아닌 양 버스에 오른다. 설렘과 긴장은 숨기고파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아 청한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면접 때 와본 그 건물이 보인다. 1층 안내데스크에서 첫 출근이라며 방문증을 받고 경영지원실에 들러 행정처리를 했다. 준비해온 서류를 건네주고 인사기록카드를 받아 못생긴 글씨체로 나에 대한 정보를 적어냈다. 그리곤 인사담당자의 손에 이끌려 내가 일할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선생님(연구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엔 아직 자리가 다 세팅되지 않은 탓에 회의 테이블에 하릴없이 앉아 있다. 점심시간이 시급하다. 겨우 아홉 시 반을 넘긴 참이다.
꾸역꾸역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점심시간이 된다. 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주된 임무인가 하고 궁금해진다. 설마 오후의 해를 보는 일까지 맡기진 않겠지 생각하며 동료 선생님들과 구내식당엘 갔다.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는데 호구조사가 끝나지 않는다. 나이는 몇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공부했는지, 어떤 일을 하다 왔는지 등.. 나이가 더 먹어 맞선을 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지만 TMT(투머치토커)의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두 대답한다. 문제는 이후 시작됐다. 처음 온 사람도 있고 일단 뭐 최악은 아닌 것 같고 배부른데 아이스크림까지 먹었으니 기분이 다들 좋았을 법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모두 웃고 있었다. 그때 우리 방을 향해 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났고, 갑자기 문이 열렸던 것 같다. 강렬한 순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다. 문이 열렸고 새빨간 색의 니트를 입은 중년의 여성분이 등장했다.
보자마자 잔뜩 화가 났구나 싶긴 했다. 게다가 이 어른의 등장으로 모든 선생님들이 기립하는 걸 보니 먹이사슬의 최상위급이겠구나 싶던 그 순간이었다. 망했다. 이분 지금 나를 찾는다. "저.. 접니다.." 아이고. 대답 한 번 찌질하다. 지금까지 뭘 했냐고 묻는데, 차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점심식사를 방금 마치고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난 정말 눈치가 없는 편이라 이분이 왜 화가 났는지를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살피더니 친절하게도 직접 이야기해주신다. 어째서 박사들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6개월 전 리서치회사에 처음 출근했을 때 입사동기들과 2층부터 5층을 오가며 수줍은 얼굴로 허리를 굽히고 다닌 그 날이 말이다. 짧은 탄식을 내뱉고 죄송하다고 말하는데 옆에 앉은 선생님이 나보다 더 죄송해한다. 누가 내 손을 잡고 다녀줬으면 좋았겠다 싶지만 옆 사람의 빨개진 얼굴을 보자니 이 조직은 그런 곳이 아닌가 보다 하고 재빠르게 겸손한 방향으로 생각을 바꾼다.
빨간 어른의 퇴장 이후, 간단한 인사말 한두 마디도 떠올릴 틈 없이 노크를 하고 돌아다녔다. 그다지 엄청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아 "안녕하세요 정평(실명아님)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따위의 말만 뿌리고 다니려는데, 아까 나와 함께 죄송해하던 그 선생님이 나 대신 자기소개를 덧붙여주신다. "전공은 사회학이고요, 리서치회사 출신이랍니다." 졸지에 밝혀졌다. 리서치회사에 다녔다는 건 박사님들에게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정보라고, 난 출신으로 불릴 만큼 그 분야에 통달하지 않아서 너무나도 부끄럽다고 맘속으로 악을 질러봐도 무슨 소용이랴. 그 후로도 이 방 저 방에 인사를 하며 '이번에 새로 온 연구원은 리서치회사 출신 사회학 석사'라는 사실이 좀 더 확실해졌다.
2019년 9월
몇 편 안 되는 내 글을 읽어본 사람은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력이 정말 안 좋은 편이다. 어렸을 때 봤던 만화에 대해 얘기하는 친구들 사이에 있는 일이 가장 큰 고역이다. 영화 관람 후기라도 적어보겠다고 나서는 날이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결국 포기하거나 영화를 몇 번에 걸쳐 보며 꾸역꾸역 인상 깊었던 순간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무척 진심 아주 몹시 부럽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간간히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면 정말 인상적이었던 경우다. 예를 들자면 작년 가을 리서치회사 퇴사를 앞두고 있었던 부사장과의 면담이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우리 회사 괜찮다. 탑티어는 아니지만 공공 조사만 하는 회사로서는 매출도 좋고, 인문계 출신 여성이 다니기엔 이만한 전문 직군도 없을 거다. 게다가 사측에서는 오랜만에 심혈을 기울여 공개채용을 했고 그중에서도 정평 씨는 특히나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뭐 그냥 나가지 말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좋게 봐주었다니 고마웠다. 흠- 하고 순간 헷갈렸지만 덧붙은 이야기에 마음이 확고해졌다. "첫 직장이 참 중요하더라. 그걸로 출신성분에 대한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닌다. 앞으로 정평 씨는 '리서치회사 출신'으로 불릴 것이다. 짧은 경력이라도 비슷한 업계에 있을 거라면 우리 회사 경력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나가더라도 보다 리서처다운 업무를 더 제대로 더 오래 하고 나가는 것이 정평 씨에게 더 이득이다."
그분은 이 충고가 퇴사를 막기에 적절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그 순간 퇴사를 결심했다. 이 선배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여기에 더 있다 보면 나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할 리서치회사 출신이 될 것 아닌가? 나는 줄곧 공공기관을 궁금해 해왔다. 솔직히 말해 공무원인 아빠와 오빠가 멋져 보였고 부러웠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동경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엔 노량진 생활이 두렵기도 했고 왠지 마뜩잖았다. 때마침 대학원에서 이 전공이라면 공부도 연구도 꽤 적성에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답은 국책연구기관이 된 것이다. 물론 리서치회사 출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도, 이 수식어구로 불리는 사람들 중 대단한 능력치를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도 안다. 수많은 훌륭한 리서처들에 비해 나의 능력이 못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당시에 내가 진행하던 조사가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었다.
2019년 4월
이전 글인 <막내연구원의 사정>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원하던 연구원에서 서류 탈락이라는 아주 짜릿한 추억을 선물 받고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공 조사를 주로 하는 한 리서치회사에 취직한다. 리서치회사가 진행하는 조사의 종류는 크게 공공, 여론, 소비자(시장) 조사로 나뉜다. 이 셋은 고객사가 다르다. 공공 조사의 경우 대부분 정부부처, 산하 연구원, 지자체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여론 조사는 대부분 정당과 언론사 등이 의뢰한다. 소비자 조사는 일반 기업들이 주요 고객층이다. 고객사는 달라도 업무의 큰 틀은 비슷하다. 다음의 내용은 필자가 경험한 공공 조사의 케이스에 가까울 수 있으며 세부적인 추진사항은 생략된다는 것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입찰과 낙찰) 고객사의 니즈(제안요청서)에 맞는 리서치를 설계하여 제안서를 작성해 입찰한다. 공공 조사의 경우 수의계약을 제외한 일반경쟁 입찰계약은 그 관련사항을 대부분 나라장터에서 확인할 수 있고 때때로 각 기관의 홈페이지에 공지되기도 한다.
조사 기획) 다음으로 해당사가 적격으로 낙찰되면 관련된 착수보고를 시작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표본 설계와 지표 설계 등의 단계다.
실사 준비) 실사(조사)를 준비하기 위해 조사시스템을 구축하고, 조사에 필요한 용품(답례품 등)을 준비하고, 조사원을 선발하며, 조사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표 등 조사 제반 사항에 대해 교육한다.
실사 진행) 본격적인 실사 진행 단계에서는 전화, FGI(표적집단면접), 방문면접 등의 조사 방법에 따라 조사가 진행된다. 이때 조사업체는 클라이언트에게 실사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때로 보완조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자료 처리) 조사가 끝나면 자료처리 과정을 거친다. 조사 결과 자료를 에디팅(확인)하고 이상치를 검증한다. 이후 데이터를 입력해 코딩하고, 데이터 클리닝 과정을 거쳐 분석할만한 로우 데이터(raw data) 자료를 만든다. 자료를 사용해 SPSS 등의 프로그램으로 통계를 처리한다.
분석 및 보고서 작성) 보고서 관련 회의를 거쳐 기초 통계를 분석한다. 필요한 통계표를 산출해 공표 자료를 작성한다. 자료는 대부분 보고서의 형태다. 두꺼운 책자로 글과 그래프, 통계표가 가득 담긴 자료집이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최종보고를 통해 계약을 마무리한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업무를 추진하는 데에는 다음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느껴왔다.
꼼꼼해야 한다. 데이터를 굉장히 많이 본다. 모든 작업이 숫자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본을 설계하는 것부터 코딩 후엔 모든 결과가 숫자일뿐더러 주어진 숫자로만 분석한다. 사회조사분석사 자격증이 꼭 필요하진 않지만 있는 사람이 많고, 기본적인 데이터 분석 툴인 SPSS 정도는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사내에 전산팀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DP(Data processing) 가이드를 작성해주어야 하고 급하게 기본적인 분석자료를 가공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을 싫어해선 안 된다. 제안서에는 글자가 들어간다. 지표 설계 시에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보고서 작업이 정말 많다. 결과적으로는 분석한 숫자에서 인사이트를 도출해 텍스트로 결과물을 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웬만큼 쓸 줄 아는 편이 스스로의 정신건강에 이롭다. 더불어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관련한 문서 편집 툴인 MS-Office와 HWP 등을 잘 다룰 줄 안다면 훨씬 편하다. 물론 사무실에 능력자가 한두 명씩 배치되어있긴 하지만, 그것이 본인이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
쓰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및 응대 스킬이다. 우리가 국민일 땐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재직자가 을처럼 보이지만 리서치회사 직원이라면 그들은 분명 갑이다. 계약서가 그렇다더라. 유도리 있고 꼼꼼하면서도 밝고 다정한 성정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는 클라이언트는 없었다. 내부고객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정도면 신입 리서처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쓰고 보니 고깝고 건방지다. 자기는 뭘 그렇게 잘할 줄 알아서 이런 이야기를 썼나 싶다. 두 번째로는 쓰고 보니 재밌어 보인다. 나처럼 흥미를 느꼈을지 모르는 그대를 위해 현직에 있는 리서처 친구의 말을 옮긴다. 읽고 나면 돌아가고 싶어 질까 봐 실눈을 뜨고 읽었다. 그만큼 멋진 친구다.
"새로운 프로젝트 할 때마다 긴장은 엄청 되는데, 긴장 속의 설렘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여긴 또 무슨 이슈가 있을까, 조사는 잘 될까 생각하면 재밌어요.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 발 정도는 담갔다고 생각하면 어깨가 으쓱하답니다.
리서처로서의 자부심은 내가 가공한 데이터로 낸 결과가 다양하게 쓰인다는 겁니다. 그게 활용에 따라서는 사람들한테 신뢰를 주고, 정책의 근거가 되고 그럴 때 뿌듯해요. 허접하지만 이게 내가 리서치회사를 선택한 이유고 다니는 이유입니다."
- 김 아무개(28세, 주임)
* 이상 내용에 대한 현직 리서처 분들의 추가 의견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020년 1월
어쨌든 부사장의 충고는 나의 퇴사를 막지 못했지만 리서치회사 출신으로 불릴 것이라는 예측은 맞았다. 이제는 이 꼬리표가 나쁘지 않다.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안다. 더 훌륭한 목표에 근접하려면 내일은 간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해봐야겠다고 다짐한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러니까, 그래도, 우리 출신성분은 따지지 맙시다. 나는 그냥 지금 여기 이대로 있는 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