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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평 Feb 04. 2020

(3) 결국 6개월 만에 또 파리에 왔다

파리는 오늘도 축제


피곤하다. 곧장 시차에 적응하는 쾌거를 이루겠다며 기내에서 한숨도 자지 않고 건방을 떨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저녁 여덟 시도 안 되었건만 내 몸은 물에 폭 담근 수건마냥 추욱 쳐진다. 이럴 줄 알았다면 두 편의 영화 관람과 한 편의 일기 작성 정도의 기내 일정은 취소할 걸 그랬다. 그래도 눈을 들면 보이는 Arrivées(도착), Sortie(출구) 따위의 프랑스 말과 마주치니 내가 기어코 또 와버렸구나 싶어 기분이 꽤 좋다.


출처: 위시빈, 惠珍_ 님의 게시물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 여정을 함께하기로 한 K의 얼굴은 나에 비해 밝다. 그에겐 두 번의 유럽여행 경험이 있지만, 프랑스는 처음이다. 실은 이번 여행에 앞서 그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유시민 작가의 <유럽도시기행 1>이었다. K는 책 첫 페이지 가장자리에 이런 질문을 남겼다.


"파리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공항을 빠져나오는 내내 그의 밝은 표정과 함께 이 물음을 곱씹는다.


우리에겐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지금 여기 파리에 오기 한 달 전부터 머리를 맞대고 각자 보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터다. 그럴 때마다 나는 K가 좋은 것이라면 다 좋았다. 먼저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다. 선물한 책 첫 장에 그가 남긴 흔적을 조금 더 훔쳐보자.


"나의 10대는 생텍쥐베리와 까뮈, 지드를 거쳐 사르트르와 보브아르로 마무리되었더랬단다. 모네와 고흐, 들라크루아로 이어졌던 시기도 있었지.
60대를 바라보는 지금 어린 나를 위로해주고 때론 도전하게 했던 그들은 나와 함께 나이를 먹지 않고 여전하구나."


여러 차례 유럽을 오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특히 지난겨울에 유럽에 왔을 땐 그야말로 미술관 좀비처럼 오르세면 오르세, 마르모탕이면 마르모탕에 죽을 치고 앉아 하염없이 모네와 르누아르, 드가와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았던 참이었다. 이런 내게 K가 고백한 것이다. 프랑스의 예술을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게다가 나의 사랑은 너의 그것보다 역사가 오래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의 나라를 딸과 함께 간다는 것은 엄마에겐 여행 그 이상의 의미란다. 엄마의 지난 세월을 부끄럽지만 네게 날것으로 꺼내 보일 수 있는 기회랄까.
엄마와 함께 할 파리가 네게도 선물이길.
오래도록 샘솟을 생명의 에너지이길."


그렇다. 그는 취향이 잘 맞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나를 낳아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좋은 것이라면 다 좋을 수밖에.


그런 그와 길을 나선다. 우선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항 입국장을 종종걸음으로 헤매다 한 층 내려와 파리 시내로 가는 RER 티켓을 사러 간다. "양옆 앞뒤 죄다 우리랑 다르게 생긴 사람들밖에 없으니 내가 정말 여행자가 된 것 같고 좋네." K의 목소리는 이미 '솔' 음계까지 올라가 있다. 프로여행자인 나는 이 정도로는 감동을 받지 않는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날린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적어도 의식적인 정신에겐 우연한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이 짧은 시간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용하게 된다. 이 시간에는 모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들이 형성되고 불안이 완화된다. 그러나 이 상태는  10분 이상 지속되는 일이 드물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K의 꿈속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파리에서 그가 느끼게 될 행복을 더 오래 더 크게 늘려주고 싶다. 그러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가고 싶은 곳과 가야 할 곳을 표시해둔 구글 맵은 이미 별천지다. 벌써 저녁 9시가 다 되어가지만 숙소 앞 베르시 빌라주(Bercy Village) 정도는 구경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캐리어 두 개와 나의 엄마를 RER에 싣는다.


별들이 우리의 고민을 대변해준다. 오른쪽 아래 우리의 집인 베르시가 있다


베르시는 파리 동쪽 끝 12구에 위치한 지역으로 에펠탑이나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 등 관광지와는 멀지만 이곳엔 핫한 레스토랑과 카페, 영화관 등이 모여있다. 밤이면 한산 해지는 파리 시내와는 달리 베르시 빌라주의 레스토랑과 바는 자정이 넘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파리 최대 와인 저장고였던 이곳은 세계 최대의 와인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제 그 하얀 돌로 만들어진 창고들은 넓은 거리를 가운데 두고 일렬로 늘어서서, 와인 거래상이 아닌 손님을 기다린다.


보라색 14호선 메트로의 Cour Saint-Emilion 역에서 내려 빌라주 방향 출구로 향하니 에스컬레이터가 떡하니 있다.

"거봐 나랑 다니면 운이 좋다니까!"

K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엄마, 메트로 1호선은 무려 1900년에 생겼지만 14호선은 100년정도 후에 개통됐어. 그래서 그래..’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함께 까르르 웃으며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와, 진짜 유럽이다. 그중에서도 프랑스고 그(유럽) 그(프랑스) 중에서도 파리다. 이제 우리에게 여행자의 자격은 충분하다.


베르시 빌라주의 밤풍경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파리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보존해준다"라고 말했다. 이뿐이랴. 1920년대의 파리를 직접 경험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제목만으로도 짜릿한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이렇게 쓴다. "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 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디를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분야든 간에 거장의 말은 한 번쯤 믿어봄직하다. 본격적으로 파리를 맴돌 내일이 기대된다.




우리의 온 삶은 결국 지그재그로 배회하며
파리를 맴도는 작은 여행이 되고 말 것이다.

발레리 라르보,
<수플로 길, 마리 로랑생의 부채를 위한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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