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평 Jan 19. 2020

(2) 이게 다 고흐 때문이다

1890년 파리에 사는 첫 번째 이유


내가 돈을 벌고 모으는 족족
파리에 갖다 바치게 된 까닭은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순전히 그 한 사람 때문이었던 거다.




언젠가는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다는 사실이 큰 고민이었다. 하지만 나를 소개하는 일이 잦은 요즘, 취미가 있냐거나 좋아하는 것이 있냐는 물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된 내가 조금은 신기하고 생경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1890년 파리에 사는 이유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림이고 뭐고 관심 없었다. 그림을 즐겨본다는 사람이라면 무릇 타인과는 다른 심미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20대 초반의 나에게 여행이란 ‘남들이 좋다고 하는, 유명하다고 하는 것을 나도 직접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출처불명의 의무감으로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을 바삐 뛰어다니며, 관심도 없는 방대한 양의 각종 희귀 유물과 작품을 영접하고 다녔던 거다. 그런 하루의 끝엔 뿌듯함은 있었으나 귀중한 하루를 들여 무얼 본 것인지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파리를 여행하고 있다는 SNS 게시물에 한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오르세미술관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음에도 민망함과 어색함을 견디며 자신의 좋은 경험의 기억을 나누어 주려는 그녀가 고마웠다. 성의를 무시하긴 어렵다는 이유로 일정을 쪼개 오르세를 찾았다. 그리고 그날은 나의 유럽여행 중 최고의 하루가 되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빈센트 반 고흐 특별전을 하고 있었고, 의도치 않았지만 그에게 제대로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 후 예술을 즐기는 데에 ‘전문적으로’ 대상을 보는 방법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내 안에 켜켜이 쌓인 나도 모를 기억과 감정의 데이터를 활용해 아름다움과 편안함, 경이로움, 유쾌함, 슬픔, 불편함, 역겨움, 뜨거움 등을 알아채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그림과 화가가 생겼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뒤 가장 좋아하는 화가에 대해 말해보라 한다면 고흐를 꼽곤 했다. 그의 삶에 짙게 담겨있는 슬픔과 우울, 고독, 쓸쓸함이 좋았고, 그림을 통해 그 감정을 훔쳐볼 때마다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남의 우울이 내 삶에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지만 갈대 같은 나에게 그는 틀림없이 도움이 되곤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인생 이야기도 그들의 그림을 좋아하는 일에 한몫을 했다. 실제로 그들의 이야기를 점차 찾아보다 보니 그림이 달리 보였고, 그림을 제멋대로 해석하며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는 말한다.

오로지 그림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줄  있을까?  가지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있다. 그런데 나는 다른 것을  수가 없고, 관심이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이렇게 그들은 그림에,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성과 색채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용감하다. 전도가 유망하고 창창한 꽃길은 제쳐두고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다소 괴상한 길을 택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보통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고흐는 겨우 10년을 화가로 살았을 뿐이었다. 2년 간의 선교사 생활을 마친 그는 1880년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기로 한다. 그해로부터 약 10년 뒤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800여 점의 회화와 10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특히 남프랑스에서 머물던 때에는 열다섯 달 동안 2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다. 무언가에 미친 사람은 무엇이든 이뤄내고 만다. 그림에 미쳐버린 그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


‘아- 나는 뭘 한다고 이렇게 나태한 것인가’하며 심장이 불끈하고 솟아올랐다. 사는 동안 겨우 한 점의 그림을 판 그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또 이렇게 말한다.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있고, 화창한 아침이 찾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그래서 늘 변하게 마련인 우리 마음과 날씨를 생각해 볼 때,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유독 자신에게만 더 냉엄하던 아버지와 뜻대로 되지 않는 목자의 길 때문에 새장에 갇힌 새처럼 살던 빈센트. 그랬던 그가 강렬한 색채로 물든 그림의 세계에 빠졌을 때엔 얼마나 아찔하고 행복했었을지, 그리고 그 단순한 행복이 오랜 지독한 추위를 어찌 견디게 한 건지 상상해보면 너무나도 대단한 거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힘든 순간마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들을 살피곤 했다. 서로에게 영혼의 단짝이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줄곧 안정되었고 종종 그 관계가 부럽기도 했다.


2017년 여름, 두 형제를 어여삐 여기던 나는 결국 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자 빈센트가 생의 마지막 두 달을 보낸 그 마을에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야 나의 시계도 빈센트가 숨을 거둔 1890년에 멈추었다. 그들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나에게도 그대들과 같은 영혼의 단짝이 생긴다면 참으로 행복할 터입니다. 그대들이 서로와 예술에 헌신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좋은 친구 그리고 좋은 일에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포기하지 않고 깊고 참된 사랑을 지키며 이런 서사를 만들어 주어 고맙습니다. 그럼 또 만나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인 나는 2년 뒤 다시 그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약속엔 유효기간이 없다.


두 남자의 무덤, Auvers-sur-oise


매거진의 이전글 (1) 내 고향은 프랑스, 그것도 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