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활 10년 차 가이드
초, 중, 고, 대학을 다니면서 우리는 영어공부를 십 년 이상을 해온다.
하지만 늘지는 않고, 짜증만 늘 뿐이다.
영어도 쥐약이던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언어인 불어가 등장했다.
이제는 피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언어가 되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불어가 늘지를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
내성적인 성격으로 남들과 어울리기보다 방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을 더 선호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였고, 6개월 뒤쯤 와인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 원서를 받으러 담당 학교를 찾아갔었다.
사전을 보면서 단어를 찾고 질문을 적어 갔었고, 떠듬떠듬 담당자에게 이야기를 했다.
Est ce que je peux avoir des documents pour entrer cette ecole?
(이 학교를 들어오기 위한 서류들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지고는 내심 스스로 뿌듯해했었다.
그리곤 담당자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xx xxx xxxx xxxxx x xxxxx xxxx xxxxxx xxx?
(얄리얄리 얄라 쏭 얄라리 얄라)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차 싶었다...
질문을 하면 그냥 서류를 줄 것으로 예상했지 질문들이 마구 쏟아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멍. 청. 이...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그냥 얼어붙은 고목나무처럼 가만히 서있고 눈동자는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곤 한마디가 내 머리에 꽂혔다.
casse-toi
(꺼져버려)
참 신기한 것은, 세계 어느 국가의 언어이든 간에 욕은 잘 들린다...
결국 한마디 대답도 못한 채 나는 발걸음을 돌렸었다.
내가 유학생활을 할 때가 2009년, 그때 유로 환율이 최고였었다.
초코바가 먹고 싶었지만, 마트에서 하나에 5천 원 정도인 것을 확인하고 그냥 내려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활을 이어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중국인들의 결집력은 참 대단 하다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를 가나 그들은 있고, 안될 것 같은 일들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중국이라는 나라의 인식이 달라졌다.
나는 중국인 친구들에게 아름아름 물어 방학 동안 일할 곳을 찾았다.
바로 딸기농장이었다.
농장주인에게 연락을 하여 일해도 좋다는 대답을 받았다.
농장이 위치한 곳은 파리 동쪽 디즈니랜드 근처, 남들은 하하호호 웃으며 가는 곳이거늘 난 작은 캐리어 하나와 등에 가방을 짊어지고 농장주인이 픽업 오기를 기다렸다.
농장주인을 따라 도착한 농장 근처 숙소...
처음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와.... 이런 곳에서 산다고? 영화 속에 나오는 곳 아니야?
폐가 건물 같은 곳에 부르스타 2개, 다 쓰러져가는 책상 위에 각종 향신료와 양념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비좁은 옆방으로는 곰팡이가 다 슬어 삭아버린 2층 침대 4개가 있었고, 그 침대로 다른 중국인 친구들이 더운 날씨에 웃통을 벗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글을 적다 보니 문득 영화 <범죄도시>가 생각났다... 윽...
멍하게 배정된 침대에 가지고 온 침낭을 폈다.
너무너무 너무... 더러웠지만 그래도 한번 누워보았다. 그리고는 내 얼굴로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2층에 있던 친구가 움직이며 삭은 매트리스 구멍으로 먼지가 다 떨어지는 것이었다..
으악!!!!!!
나는 머리를 붙잡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해보자
마음을 다잡고 다음날부터 딸기를 따러 나갔다.
낮의 날씨는 너무나 더워서 일을 하지는 않았고, 이른 아침과 저녁에 작업을 했다.
하루 온종일 무릎을 굽히고 딸기를 따려니 힘들기보단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난 mp3에 저장시켜놨던 라디오 "컬투쇼"를 무한 반복하며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마저 없었다면 난 정말...
하지만 결국 사건이 터졌다.
배드 버그에 걸린 것이다... 그때 난 생각했다.
아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날로 딸기농장을 나와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결국, 일을 하지 못해 학교 등록금이 부족했다.
유학을 떠나오며 다짐했던 것 중 하나가, 절대로 부모님께 손 벌리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결국, 부모님께 손을 벌리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와인학교에 다시 문을 두드렸고, 정말 짧은 불어로 입학을 했다.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역, 쥬브레 샹베르땅(Gevrey-Chambertin) 마을에는 와인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분이 한분 있다.
바로 "박재화" 선생님.
일본인 남편분과 함께 와인을 만들어가고 있는 분으로 부르고뉴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 그 누가 도움을 안 받았을까?
어느 날,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와인 코르크 막는 작업할 사람 필요한데, 와서 도와줄래?
나는 한걸음에 달려갔고 열심히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코르크를 막고 있었다.
근데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며, 안내를 해 주셨다.
작은 와인 테이스팅 방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자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현재 프랑스 자전거나라 지점장을 포함한 식구들을 만난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누나가 가이드로 일을 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고, 나에게도 한번 해보지 않겠냐며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누나가 프랑스 자전거나라 지점장에게도 내 이야기를 했었던 터였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자전거나라 식구들이 테이스팅을 하다 박재화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내 이름이 나왔고, 지점장은 "어? 그 친구 아닌가?"라고 하면서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처음 안면을 틔였고, 나는 가이드로써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