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의 이름은 우리가 살아가며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도 그의 이름은 등장을 한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략)..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쟘],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중략)..
나는 그의 존재를 최근에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에 대한 책을 읽어가며, 로댕 말년의 비서가 젊었던 릴케라는 것을...
그리고 릴케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떠올랐던 와인이 하나가 있었다.
우선 릴케는 1875년 프라하에서 태어난 20세기 독일어권을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육군학교에도 입학했지만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그에게 군인이 되기위한 교육이 맞지 않았고, 그는 중퇴를 하고 글을 써내려간다.
그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가 직접 집필한 책은 아니다.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문학 지망생이 있었는데, 그는 릴케가 중퇴를 했던 군사학교의 생도였고 우연히 카푸스는 릴케의 책을 접하게 된다.
그 때,호라체크 선생님이 카푸스 곁에 다가오는데 찬찬히 책의 표지를 들여다 보고는 의아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고 카푸스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인가요?
그리고는 이리저리 책장을 뒤적여 두어편 시를 읽어보고는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다, 마침 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다시 말을 했다.
그럼 그 르네 릴케라는 생도는 시인이 되었군요.
아마 선생님도 릴케의 특별했던 모습을 오랬동안 기억하고 그가 시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뻐하며, 감회에 젖어있던 것 같다.
카푸스는 용기를 내어 릴케에게 자신이 적은 습작의 시들을 보내어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심한다.
단 한번의 대면도 없던 사람에게 편지를 적다보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몇 주 후 릴케에게서 너무나도 성실하고 아름다운 필체로 적힌 그의 답장을 받게 된다.
그렇게 1903년 2월 17일부터 1908년 12월 26일까지 약 5년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엮어 만들어진 책이 바로 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책의 첫구절에 나오는 한 문장이 젊은 시인 카푸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그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인생은 옳은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지칠때마다, 곱씹게 되는 그의 이 말은 마치,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옳다고, 그러니 힘을 내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같다.
릴케의 글, 특히나 그의 시는 한구절 한구절 읽는 순간 눈을 감으면 머리 속 캔버스 위에 그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귀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 잔잔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며, 피부로 전해지는 따스한 햇살과 바람...그리고 바람에 살랑 일렁이는 나무 이파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입에서는 그저 ”아...좋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내뱉어진다.
그의 시는 따뜻하고 감성적이고 그 무엇보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깊은 따뜻함의 여운이 쉬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의 시중에 내가 가장 처음 접했던 시가 있다.
바로 “가을 날”이다.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짙은 포도주에는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혼자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매일 것입니다.
이 시의 첫 구절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독일어로 하게되면 데어 좀머 바르 제어 그로쓰(Der sommer war sehr gross)인데, 이 이름을 딴 와인이 있다. 바로, 독일 모젤지역의 프란쩬 와이너리의 와인이다.
독일의 포도밭을 직접 보게 되게되면 깜짝 놀라게 된다.
경사가 70도가까이 되는 곳에서 농부들은 구슬땀을 흘리고 한알한알 포도를 직접 손으로 수확을 하여 와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프란쩬 와이너리의 현 소유주의 아버지가 강한 여름 햇볕 아래 포도밭에서 일을 하시다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추억하고, 기리는 의미로 이 와인을 만들었다 한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산미가 시간이 지나며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게 되고, 수많은 과실들의 향기가 퍼져나가면서 항상 기분이 좋아지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던 와인...
언제쯤 다시 프란쩬 와이너리에 방문해 볼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방문하여 이 젊은 부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당신들의 와인으로 전 참 행복했었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처럼 따뜻하고 감성적이며 마시고 난 뒤, 입과 코 그리고 가슴에서 긴 여운을 느낄수 있는 이 와인 한잔과 함께 그리고 릴케의 시와 함께 바쁜 일상 속에서 잠깐의 여유를 느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