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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되면서 돌아보는 나의 20대 여행 이모저모2

20대에 10개국을 돌아다니면서 회고하는 오늘 (몽골, 미국, 쿠바편)

by 삶송이

긴 설 연휴기간에 약 134만 명이 해외 출국을 했다고 한다. 설 이후, 2월 속히 연휴병을 안고 이번 첫째주를 보내면서 갤러리 속 사진들을 다시 보는 시간이 늘었다. 어른이 될수록, 좀더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갈 수록 여유보다는 책임감이 따른다. 쉬는 날이 많을수록 내가 더 할 것들과 해야할 목록들을 늘려나가는 듯하다.


이럴수록 스스로에게 각박해지기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현재와 미래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시간이 더더욱 필요한 듯하다. 2월 두번째 주말에도, 한번 지난번에 이어서 한번 20대의 여행을 회고해보고자 한다.


[1탄 다시보기] 일본, 영국, 유럽

https://brunch.co.kr/@jungrnii/150



#스물넷, 몽골

당시 내게 '사막'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스물넷, 고작 24살이었는데도 뭐가 그렇게 불안했는지 모르겠다. 누가 뭐라하면 그 방향으로 경로를 바꾸고, 꾸짖으면 꾸짖는대로 눈물을 보이는 그런 상태. 주체도 주관도 없는 백화점 속 마네킹과도 같아서 남들이 입혀주는 옷만 입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당시, 울란바토르에 도착해서는 막 산업화된 도시 느낌을 받았다. 그 떄 사귄 친구가 한국인(성실이)와 몽골인(베이글)이었다. 공용어인 '영어'를 쓰면서 몽골 문화나 환경 등을 익혔던 것 같다. 생일에는 이마트에서 산 케익으로 조그맣게 파티를 했고, 기숙사에서 서로 이러저런 잡담을 하며 20살 초반의 여자애들처럼 놀았다. 그러다가 우리끼리 시간을 맞춰서 고비사막 여행을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보통 한국에서 몽골여행을 하면 값비싼 여행사를 끼어서 투어를 하거나 아니면 동행을 구해서 가게 된다. 당시, 2019년에는 그러한 정보가 즐비하지 않았고 사실상 유튜브도 활발하지 않았기에 맨땅으로 사막여행을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기차역으로 가서 고비사막 쪽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끊고 무작정 2-3주를 가기로 했다. 베이글이 있어서 몽골어나 현지 통역은 문제가 없었고, 나랑 성실이는 이마트에서 한국과자나 음식 등을 마구 싸서 배낭에 짐을 가득 싼 것만 기억난다.


사막 중심부로 들어가는데는 택시를 빌렸고, 사막에서 거주하는 동안은 게르 생활을 하였는데 여기서 치열하게 고민도, 생각도 많았던 날들을 보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날것의 상황 속에서 보면 나는 참으로 욕심이 그득한 사람이었다. 콩으로 빗은 음식이며, 화장실이 없어 바깥 아무데나 볼일을 보거나 교통수단이 낙타인 상황 등등이 처음 며칠은 즐겁다가도 숨겨진 내 욕망들을 드러냈다.


이처럼 몽골은 그런 곳이었다. 너무나도 불안하고 날카로운 시기에 방황할 때 갔던 나라. 하루하루 편안한 숨을 쉬기보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꾸짖기 바빴던 그런 2019년이었다.


몽골, 고비사막은 평생에 거쳐 한번쯤은 가볼만 한 듯하다



#스물다섯, 미국

부모님이 여권을 숨기셨다. 매해 둘째딸의 세계로 향하는 방황은 부모님조차 감당이 어려우셨나보다. 부모님을 설득한 명분은 "취업"이었다. 그래서 떠난게 '미국'이다. 미국 디즈니월드 international internship 채용이 있었고, [1차 서류 > 2차 디즈니월드 코리아 인터뷰 > 3차 현지 인터뷰]를 거쳐 합격을 하였다.


미국 비자, 거주 비용, 영어회화 실력 등등 다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미국"이 가고 싶었는데, 그냥 갈 수 없으니 이유를 만들어야했다. 가장 분명하고도 설득력있는 계기가 필요했고 그게 이거였다. 미국 비자 심사받으며 준비하고 미국 가기 전에 자금을 모으는 것부터 나한테는 역시 일을 저지른 이후 수습하는 게 빡셌다. 가장 많이 영어 공부를 했고, 일당으로 공장다니면서 돈도 모았던 것 같다.


그렇게 출국한 미국. 애틀란타 경유하면서 nct 유닛 멤버들과 같은 항공편을 탔다. (당시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미국에서 생활은 스스로 "기준"을 만드는 계기였다. 여러 국가에서의 친구들이 왔고, 문화가 혼재되고 시차가 바뀌고 먹는 식습관이 달라지면서 호불호가 갈리고, 욕망과 절제가 혼용되면서 한번에 너무많은 유혹들이 쏟아지는 그런 곳이었다.


일은 일대로 힘들지만, 안 힘든 일이 없으니깐 지낼만 하였다. day-off에는 어떤 활동을 하느냐가 중요했는데 처음에는 housing(기숙사 같은 개념) 내 pool이 있어서 수영도 하고 테니스도 살짝 치다가, 점점 대외적으로 플로리다주 주변 도시 여행, 보이그룹 콘서트, 놀이동산들(디즈니월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씨월드 등등) 탐험, 쇼핑, 홈파티 등등 현지 생활에 적응하며 즐기게 되었다.


하루이틀 있는 게 아니라 거진 1년을 생활했다보니, 풀어야 할 내용들이 많지만, 한 줄 정리하면 현재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삶의 기준"들을 만든 시간들이었다는 거다. 하면 안되는 것들에 대한 명확한 선을 만들고,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미국은 다채로운 무지개 색깔과도 같은 나라였다


#스물여섯, 쿠바

동생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남미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쿠바. 좋다/싫다를 따지기 전에 나는 매우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누가 가자고 하면 그냥 가리지말고 했다. 그렇게 쿠바 비행기 티켓을 바로 구매했다. 이후, 쿠바 비행기에 대한 비자 발권을 고려하였고 더 이후에는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로, 이것저것 다 안됐지만 "데이터"가 안터져서 와이파이 카드를 구매해야한다는 것도 늦게 알았다.


원래 계획했던 2주가 아니라, 거의 한달 반 정도를 쿠바에서 보냈다. 쿠바 > 미국 > 한국행 티켓이었는데 쿠바에서 미국으로 경유지 승인이 안되었고, 한국 대사관도 없어서 남미 KOTRA 컨택을 했어야했다. (굉장히 복잡하긴 했다..) 그렇게 쿠바 한인민박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쿠바 하바나 생활을 통달하기도 하였다. 그런 곳이다. 쿠바는. 계획이 일그러져서 멘붕과 동시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런 나라.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종종 만나면 신혼여행을 쿠바로 가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쿠바 한인민박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었고, 한국행 티켓을 구했다. 쿠바에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대개 현실이 빡센 분들 혹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쿠바에서 외부와 소통 안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서른인 지금, 그 심정을 알겠더라. 당시에는 한국에서 온 언니, 오빠들 얘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안되었는데 이제는 그떄의 언니/오빠가 되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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