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브런치에서 알람이 왔다.
“작가님의 글을 본 지 365일이에요”
365일
365일 전에는 내가 뭐라고 썼던가.
365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성격 좋다는 얘기가 듣기 싫을 만큼 열정 넘치는 내가 있었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글 하나 완성하지 못하는 내가 있다.
15초 기준의 카피는 약 6~7줄 정도의
나레이션과 자막으로 구성된다.
지난 1년 동안 6~7줄에 나는 철저히 평가당했다.
절친도, 엄마 앞에서도 쏟아본 적 없는 눈물을
택시 아저씨 앞에서, 회의실 팀장님과 팀원들 앞에서 철철 흘리고
현관문을 열고 마주한 동생들의 얼굴 앞에서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었고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안쓰러운 눈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그 6줄로 설득 하나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문제는 곳곳에서 발견됐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던 어느 날은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내 말에
너는 하루키를 좋아해서 긴 글을 많이 읽다 보니
짧은 호흡에 광고를 못써내는 게 아닐까 라는 날도 있었고
그래서 생각해낸 대안으로
드립과 짧은 호흡이 난무하는 일본 만화를 억지로 눈에 구겨 넣던 날도 있었다.
문제 투성이로 느껴지는 내가 때로는 서글프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런 것들은 그렇게 큰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취향은 만들어갈 수 있는 거니까.
문제는, 그러니까 내가 심각한 것은 의외의 지점이었다.
회의는 각자 준비한 논리와 아이디어 (시안)를 발표하는 시간이다.
내가 고심해서 가져간 아이디어, 그리고 팀원들이 고심해서 가져온 아이디어가 모두의 발표가 끝나면 회의실 벽에 빽빽하게 붙는다. 붙어있는 에이포 용지위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을 보고 있자면 만감이 교차한다.
여기서 정말 좋은 아이디어는 과연 뭘까?
광고주의 과제를 가장 잘 풀어온 아이디어?
아니면, 광고주의 생각을 뒤집는 아이디어?
그것도 아니라면
광고주의 생각을 뛰어넘는 아이디어?
1년 동안 회의를 거듭한 결과
내가 느낀 좋은 아이디어는 지구력 있는 주인을 만난 아이디어였다.
(과제에 충실한 것은 기본이라는 전제하에)
여기서 말하는 지구력이란, 아이디어에 대한 애정, 논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회의자리에서의 근성 같은 것들이다. 나는 열정을 다해 아이디어를 쏟아낸 뒤 회의시간의 지구력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쏟을 수 있는 열정의 범위는 딱, 아이디어 파일의 저장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했다. 난 대부분의 판단을 회의 판단자에게 맡겨두는 편이었고 결과가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그냥 받아들이는 축에 속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좋은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갖춰져야 할 내 지구력의 “동기”가 너무 부족했다. 정말 엉뚱한 얘기가 아니고서야, 다들 오랜 시간 깊은 고민 끝에 나온 생각들이 그렇게까지 잘못될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좋은 아이디어는? 애정을 갖고 마지막까지 아이디어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사람이 내는 아이디어다.
당황스러웠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는 힘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이건 내 욕심과 열정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과, 왠지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일할 수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을 울면서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어이없게 의외의 타이밍에 힘을 쓰지 못하는 내 모습을 마주하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치만 조금 슬픈 마음이 드는 것 까진 아직 내가 어찌할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