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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녕그것은 Dec 06. 2019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지극히 정령의 이야기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버린 것을.




 달리기는 원래부터 달리기다. '닫다'라는 단어의 사동사가 '달리다'이고 이것의 명사형이 '달리기'가 된 것이라 한다. 내가 아는 달리기는 윤상 작곡의 그 '달리기' 뿐이었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는 누가 나에게 달리기를 강요할 수도 없었고 나도 달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경보 정도의 시늉만 보일 뿐 두 다리는 위태한 하이힐 위에 날 안전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M은 나와 세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친구였고 서로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 싶을 즘이면 한 번씩 싱겁게 연락을 주고받는 15년지기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꽤 오래 연애를 했는데 스키라는 공통사를 갖고 만난 그들이었기에 한동안은 스키장 사진으로 도배가 되는 듯하다가 점차 그녀의 피드는 다양한 기록이 난무하는 운동인의 인스타그램이 되어있었다. 내 눈에는 너무 매니아틱한 사이클용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고 그중에도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운동은 달리기었다. 그녀는 작년부터 각종 마라톤에 참가하고 있었고 완주 메달은 피드에 자랑스럽게 걸려있었다. 그녀는 우리 회사 주변에 시티런이 많이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다리만 건너면 바로 서울숲인 점을 강조하며 종종 함께 달릴 것을 권유했다. 나는 운동화를 챙겨오기엔 내 가방은 너무 조그맣고, 땀이 나면 씻어야 하는데 밖에서 샤워하는 게 여간 불편하다, 그리고 오늘은 역시나 야근을 할 것 같다는 등의 조잡스러운 이유를 대며 그녀의 권유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월요병에 시달리고 있던 어느 오후, 평소 같지 않은 M의 카톡이 왔다.  그녀의 이야기는 연애의 참견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놀라운 수준이었고 그들은 요란하게 4년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다. 연애하던 M의 모습은 수도 없이 많이 봐 왔지만 이별을 겪어내고 있는 M의 모습은 15년 중 처음이었다. 어떤 날은 내가 그녀보다 더 취해 집으로 실려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1시간 30분이 걸리는 우리 집까지 찾아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날도 칼칼한 국물이 먹고 싶다며 우리는 성수동을 이리저리 헤매다 어느 횟집으로 들어가 매운탕을 시켰다.


 소주 한 잔을 따르며 그녀는 말했다.




"나 근데 걔랑 마라톤 나가기로 한 게 있어. 이제 곧인데......"

"그래? 그냥 환불해"

"환불 안 돼. 그래서 말인데 니가 좀 같이 나가야겠다"

"내가? 왜? 갑자기? 나 못해"

 "어차피 내 연구실로 시켜서 나한테 배번이랑 티셔츠 다 올 거야. 니가 걔 꺼 달고 뛰면 돼"




 그녀는 계속 할 수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게 할 수 있다고 그냥 되는 일인가. 달리기라고는 우사인 볼트와 이봉주 선수뿐인 나인데. 몇잔 더 들이키고 그냥 호기롭게 말해버렸다. 그깟 마라톤 내가 같이 뛰어주겠다고. 우리는 다음날 서울숲 아디다스 센터에서 만났고 그녀는 러닝화부터 허리밴드까지 내 것까지 가방에서 모두 꺼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3km를 달릴 거라고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수치에 감각이 신기할 정도로 떨어지는데, 나에게 3km는 고속도로에서 쉬지 않고 '이 정도' 속도로 3분을 가면 3km라는 전 남자친구의 설명이 전부인 숫자에 불과했다. 그만큼 두려움도, 아무런 생각 없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덜컥 서울숲으로 나갔다.




 우리가 달리는 코스는 서울숲을 작게 세바퀴를 도는 코스였다. 서울숲은 5월에 촬영을 하며 한번 구석구석 가본 적이 있는 터라 왠지 친숙했고 세바퀴는 거뜬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어설픈 출발에 비해 몸이 가벼웠다. 역시 집에서 오분씩 하던 유튜브 홈트레이닝이 이렇게 빛을 보는구나. M은 운동용 시계로 우리의 속도를 체크하며 조금 속도를 낮춰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정도라면 세바퀴는 거뜬할 것 같았다. 한 바퀴 코스 속에는 눈에 익숙한 튤립 정원도 있었고 몇 달 지나진 않았지만 어느새 추억이 된 촬영스팟도 곳곳에 있었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두 바퀴를 카운팅 할 때는 이마에 땀이 조금 맺히며 '운동 좀 되는데?'라는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까지였다.


두 바퀴 반이 되자 나는 급격히 숨이 차오르고 눈에 띄게 속도가 줄어들었다. 모든 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있으면 눈이 부신 거 같아 힘들었고 불빛 하나 없는 곳은 너무 깜깜해 숨 막혔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내 손바닥조차 불편했다. 손을 쥐어도 펴도 숨은 계속해서 가빠 왔고 출발 지점은 달려도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세 바퀴째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추억이고 나발이고 나는 이대로 죽어 오늘이 생애 마지막 서울숲이 되겠다는 생각 정도, 그렇지만 절대 멈추지 말고 천천히라도 뛰라는 M의 말만 딱 한번 믿어본다고 생각한 정도. 좀비런을 의심케 하는 몰골로 3km를 무사히(?) 다 뛰었고 출발 지점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려는 나를 M은 독하게도 일으켜 세웠다.



"지금 앉거나 누우면 안 돼. 천천히 걸으면서 숨 크게 들이마시고 머리로 산소를 보낸다고 생각하고 호흡해"


 대답할 수도 저항할 정신도 없었다. 무작정 내 모든 행동을 막는 M을 한대 때리고 싶었다. 그러나 팔 하나 올릴 힘도 없어 그저 그녀를 따라 했다. 1-2분이 지났을까. 믿을 수없이 호흡은 멀쩡히 돌아왔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우습게도 또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 것만 같았던 몇 분 전 순간들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이래서, 이거구나 싶었다.



 달리기에는 어떤 기술도, 장비도, 제약도 필요하지 않다. 물론 제대로 잘 달려보겠다면 러닝화는 신어줘야겠지만 두 다리만 있다면 누구든 그 자리에서 바로 달리기 시작할 수 있다. 모델 한혜진이 대화의 희열에서 했던 얘기가 있다. 세상은 정말 내 맘대로 되지 않는데, 세상에서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건 몸 밖에 없다고. 나에게 달리기가 그랬다. 달리기에는 금수저도, 나이도, 성별도 없다. 누구에게도 도움닫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느새 진짜 겨울이 다가와 가쁜 호흡을 뱉을 때마다 입김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요가나 필라테스를 할 때와는 또 다른 집중의 시간이다. 언제든 내가 멈추면 끝나는 게임. 그래서 도저히 멈출 수 없는. 너무나 평등하고 지극히 내 의지 중심적인 움직임. 바로 달리기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M에게 마치 신파극에 나올 것 같은 말을, 그렇지만 수줍게 한마디 했다. 이 세상은 달려본 사람과 달려보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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