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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녕그것은 Aug 07. 2023

고봉밥 한 그릇

2021년 2월 15일 다이어리 한편


  

진짜 너무 힘든 일상이지

근데 이런 얘기를 하면

보통 부모님이나 선임들은 자꾸

참고 견디라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

과정이라고..


근데 언니는 그걸 버텨도 길이 있을 거고

다른 쪽으로 길을 파도 잘할 거야

언니의 색이 있어서..


이건. 싸구려 위로가 아니야.

언니는 너무 너무 자기의 색을 

지키기 어려운 사회에서

자기를 잘 지키고 있지


언니가 회사에 고민인 것에

너무 고민하지 마

언니는 색이 뚜렷해서

그것보다 훨씬 좋은 색을 갖고 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언젠간 알게 될 거야






1년 8개월

개복치처럼 퇴사하고

불사조처럼 살고 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일이 넘쳐 날 때는 일을 쳐내고

상사에게 까이느라 불행했고

간헐적으로 일이 없을 때는 불량식품 같은

달콤한 여유로움에 익숙해질까 불안했다


나올 수밖에 없었던 나는

결국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2022년

코로나 지원금으로 받아 산

위태로운 노트북 하나에 지탱한 채

 서울에서 제주를 종횡무진하며

동시에 3개의 프로젝트를 쳐내야 했던

놀라운 한 해를 보냈다


출퇴근이 없는 직종으로

뜻밖의 전직을 하게 됐는데

디지털 노마드의 꿈은 이뤘지만

그냥 유목민 그 자체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나 혼자

스타렉스를 몰고 달렸던 적도 있고

하루에 서울- 대전 - 대구 - 부산 - 제주를

찍은 날도 있었으며

좀 쉬자고 떠난 후쿠오카에서는

숙소로 가는 기차에서

멀미로 찾아온 두통을 견뎌내며

작업물을 급박하게 카톡으로 보내는

일 같은 건 허다했다


회사에 다닐 땐

그다지 줄어들 일 없던 명함이

퇴사하고 나서는 일 년 새 한통을

다 쓸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기라성 같은 팀장님의 구성원이었기에

회사에선 분쟁 같은 건

생각 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회사 밖에서는 정말 황당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넘쳐났으며

정말 무책임한 중년 아주머니,

아즈씨들 덕분에

1일 1분노를 장착하고 살았다



회사 다닐 때 갖던

사유와 고민의 시간은 사치였다


처음 마주한 노마드 생활은

일의 시작과 끝이라는 테이프를

스스로 끊어본 적 없는 내게

정말 유목민과 같은 몰골을 선사했다


정신없는 일정을 조율하고

놓친 것이 없나 세 번, 네 번 체크하느라

머릿속은 잠자는 시간에도

계속 돌아가고 있었고

대기하는 시간조차

카톡창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손가락은 키보드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이 전에 느꼈던 불안과 불행과는

또 다른 허기였다



월요병을 앓으며 회사를 다니던,

일요일 저녁은 나를 감싼 고민과

오늘 나를 채워준 만남,

생각을 한 자 한 자 다이어리에

바느질하듯 써 내려가던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둔 채

월급날 잔뜩 쟁여놔

커버도 뜯지 않은 책들의

포장을 신나게 뜯던,


그런 시간들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막연히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새벽

문득 상자에 넣어뒀던

2021년 다이어리가 궁금했다


눈물과 한탄으로 얼룩진

회사 이야기들 가운데

내 글씨로 내가 받아 적은

그녀의 카톡이 있었다


.

.

.

.

.



이런 날이 있었고 이런 위로를 받았다

나라는 사람이.



무슨 사색이 더 필요하고

사유가 더 필요할까

한 순간 가난했던 마음이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저 카톡을 받았던

2021년 2월의 새벽도

부자가 된 것처럼 두둥실 떠오른

그 기분을 잡아두고 싶어서

메모지에 새겨 넣듯 써서

다이어리에 부적처럼 붙여놨었더랬다




싸구려 위로 같은 건 못 하는 그녀는

2년이 지난 오늘도 나에게

든든한 고봉밥 한 그릇을 이렇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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