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교사가 되다
대학교 4학년 때 치게 된 임용고시 - 아주 큰 점수 차이로 떨어지다.
그때 당시 부산에서 생물 교사 6명을 채용할 예정이었고, 나는 우리 과 4등으로 졸업할 예정이었으므로 아무리 임용고시는 한 번에 합격하는 것이 어렵고 장수생이 많고, 경쟁률도 높다고 하지만 나는 막연하게 6등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냐면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어떤 것을 도전했을 때 실패라고 할 만큼의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 입학할 때도 가고 싶었던 생물교육과에 큰 어려움 없이 합격했고, 임용고시 가산점을 위해 영어 공부나 자격증을 취득할 때도 심지어 운전면허를 딸 때도 거의 한 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가 어떤 시험을 준비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임용고시 재수 준비의 해 - 성숙한 정생물이 되는 거름이 된 시기
다들 0.XX의 점수로 탈락을 한다고 들었지만 내 첫 임용고시 접수 확인을 했더니 진짜 과락만 넘긴 정도로 합격권 점수와는 아주 큰 차이로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뭔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내가 공부를 진짜 열심히 안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단 1년 더 올인해보고, 또 떨어지면 교사가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 당시 새로 도입된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자고 다짐하고 임용고시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당시 버스 환승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우리 집에서 부산대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에는 버스를 두 번 타고 가야 했는데 버스비가 아까웠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 주변 경쟁자들을 보면서 열심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 먹어야 하는 점심과 저녁 값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은 과외를 해서 모아둔 100만 원 정도의 돈이었다. 1년 동안 100만 원으로 생활하려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고, 나는 우리 집 옆에 있던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도착하는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3개월씩 끊으면 할인을 해줬고, 그렇게 3개월씩 3번만 돈을 지불하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교육학 인강이나 생물 전공 강의를 듣는데 쓰고,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었기 때문에 식비는 쓰지 않으면 100만 원으로 1년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계획이 섰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한 번에 교사가 되었다면 나는 진짜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왜냐면 이 시기에 진짜 많은 생각을 했고, 나는 많이 성숙할 수 있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매일 거지 같이 화장도 안 하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독서실과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특히 공부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에는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친구들이 공부 잘 되고 있냐? 화이팅! 이런 응원 문자를 보내줄 때도 내가 공부가 잘 안 될 때 그런 문자를 받으면 '내가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하면서 답장을 하지 않기도 했는데 사람이 스스로 스트레스 상황에서 꼬여 있으면 상대방의 좋은 마음도 내 안에 들어올 때 꼬여서 들어오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시 주로 아빠가 늦은 밤에 나를 데리러 종종 독서실에 와서 같이 집으로 걸어갈 때가 있었는데 공부를 제대로 못한 날이면 응원해 주는 아빠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미안했다. 그럴 때면 집에 가서 "이승환의 가족"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다음 날부터 다시 내 마음을 다 잡는 시간을 보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GMgpE3sjRg
두 번째 맞이한 임용고시 - 부산 1등으로 합격하다.
1월 27일 최종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재수를 하던 해에는 부산에 생물 교사 2명을 채용했고, 1차 합격자에서 3명을 뽑은 다음 최종 합격에서 한 명만 떨어지는 상황이었으므로 3등으로 떨어지면 어쩌지 하면서 진짜 마음을 졸이며 인터넷 창을 켰다.
합격한 것을 확인하고 펑펑 울면서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엄마는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개인정보보호가 안되던 시절이라 교육청 홈페이지에 합격자 명단이 다 발표되었으니 그걸 본 친구들의 축하 문자가 쏟아졌다.
나중에 점수를 확인해 보니 나는 부산 1등으로 합격하게 된 걸 알게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부산에서 생물 교사를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아 삼수하는 친구들은 경기도나 울산에 갈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발령이 원칙이라고 들었지만 1등을 한 사람에게는 고등학교 발령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들어서 나는 제발 고등학교 발령이 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나는 과학 선생님은 싫고, 생물 선생님으로 아이들에게 불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규 발령 전 연수가 교육연수원에서 진행되던 시기에 신규 발령 학교가 발표 났는데 새로 생긴 고등학교에 발령 났다는 것을 알고 진짜 기뻤다. 이제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생물 교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첫 제자와 7살이 차이 나면서 아이들이 날 친구처럼 대했고, 첫 학교에서 아이들이 날 정생물쌤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첫 학교에서의 좌충우돌 정생물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