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를 모르는 사람도 그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무력을 통한 통치, 비도덕적인 방법도 옹호하는 '무자비한 악인' 인상이 강하다. 뒤늦게 궁금해서 읽어본 '군주론'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가 활동하던 15세기 말~16세기 초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 → 프랑스 침략 이후 피렌체 공화국 → 메디치 가문으로 권력이 교체되며 혼란을 겪던 시대였다. 그는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강대국 사이에서 국제 정치의 민낯을 목격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군주에게 조언하는 '군주론'을 썼다.
피해를 주려거든 확실히 주어야 한다.
... 이와 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것은, 사람을 다룰 때에는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다정하게 대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해주려는 마음, 통제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학생들은 착한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반항한다. 무서운 선생님에게도 과연 그럴까? 적절한 권위 행사가 필요할 경우도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가해 행위는 단번에, 은혜는 조금씩 천천히
... 국가를 탈취한 정복자는 그가 행해야만 하는 가해 행위들에 대해서 결정하되, 모든 가해 행위는 단번에 실행하고 매일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중략) 가해 행위는 모두 단번에 시행되어야 하며 그래야 그 정도를 덜 느끼기 때문에 반감이나 분노를 작게 일으킵니다. 반면 은혜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베풀어야 하며 그래야 그 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마키아벨리가 악마화 된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과거를 생각해보면, 전쟁과 정복은 일상적이었다. 가해 행위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다. 적어도 짧고 굵게 해야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제안이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통솔할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 한다.
... 군주라면 반드시 직접 최고 군 통수권자로서 군대를 인솔해야 하고, 공화국이라면 인민 중에서 장군을 선정하여 파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파견된 자가 유능하지 못하다고 판명되면 교체해야만 하고, 유능하다면 그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지 않도록 법적 통제수단을 확고히 해서 그를 견제해야만 합니다.
무력의 형태는 원군, 용병, 자신의 군대 세 가지가 있다. 그중에 자신의 군대를 강조한다. 이탈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용병으로 인해 좌지우지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에게는 전쟁 수행 능력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우리나라 IT 산업이 떠올랐다. IMF 이후 외주화 경향이 심해졌다. 당시만 해도 IT는 기업의 핵심 기능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회사에 SI나 SM 형태로 외주를 맡기는 구조가 보통이었다. 그나마 계열사가 많은 대기업들은 IT 관계사를 운영했을 뿐이다. 이 시기의 개발자들은 박봉에 고객사에게 괴롭힘 당하며 야근하는 고통을 겪었다. 공대에서는 '전화기(전기, 화학, 기계)'가 최고였고, 컴퓨터공학과의 인기는 낮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기업들은 IT 역량이 경쟁력이라고 판단하고, 뛰어난 개발자들을 영입하기 위해 높은 급여와 복지를 제시하고 있다. 21세기에 IT 역량은 기업의 군사력이다. 원군과 용병만으로는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필요하다면, 악덕을 행하고 나쁜 평판에 개의치 말라
... 훌륭한 성품 모두를 갖추기란 불가능하고, 현실적 상황들은 그 성품들을 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미덕의 삶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잃게 할 정도의 나쁜 평판만은 피하도록 신중해야 합니다. 또 정치적으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악덕일지라도 가급적 피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정치적으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악덕은 별다른 불안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악덕 없이는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악행으로 인해서 나쁜 평판이 발생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악덕을 감행하고 평판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현대 민주정치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지만, 제3세계나 회사 내부같이 폐쇄적인 집단에서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권력의 공백이 사회의 불안을 야기하는 환경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평판보다는 지위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관대하면 경멸당하고 미움받는다.
...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 비난은 물론 미움까지 받게 되어 결국 탐욕스럽다는 평판을 얻는 것보다, 비난을 받을지언정 미움은 받지 않도록 인색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것입니다.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인자함이다.
군주는 무자비하다는 것보다는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단, 인자함을 잘못된 방법으로 베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중략) 군주는 백성의 결속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충성을 바치도록 할 수만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중략) 지나친 자비로움은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데, 군주가 집행한 가혹한 조치들은 특정한 몇몇 개인만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굳이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군주는 많은 이해관계, 집단, 사람 사이에서 판단해야 한다.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신이 된 주인공이 기도를 듣기 귀찮아서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줬더니, 모든 사람의 복권이 당첨되어 벌어진 혼란이 떠올랐다. 어떤 사람들에게 유리한 것은 반대로 어떤 사람들에게 불리해질 수 있는 것이 사회이다. 인자함과 자비로움은 미움으로 연결될 수 있으므로 차라리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낫다는 제안이다.
군주는 짐승의 성품을 갖춰야 한다.
... 법만으로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힘에 의지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고루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중략)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거나 약속을 맺었던 이유가 사라지면, 약속을 지킬 수도 없고 지켜서도 안됩니다.
(중략) 군주는 운명의 방향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 자신을 제약할 때 스스로의 행동을 그것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유 진영의 민주주의 정치는 이러면 곤란하다ㅋㅋ 하지만 국제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해된다. 우리는 국제무대에서 UN 같은 단체, 국제법, 협약 등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는지 알고 있다. 나라 사이의 문제는 군사적, 경제적 힘의 논리에 좌우된다. 미국도 국익 앞에서는 약속과 다른 행동을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군주론은 내게 '일반적인 도덕이 국가 단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도덕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크지만, 현실 속 문제들은 어렵기만 하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열차 기관사인데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고 하자. 원래 선로로 가면 5명이 죽을 것이고, 경로를 바꾸면 1명이 죽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는 한 명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선택해야 한다.
강대국 사이에서의 국제 정치,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비슷하다. 시야를 좁히면 우리들의 삶과도 연결된다. 내 회사나 조직을 강하게 만들고 강력한 경쟁자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인사이트를 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현실적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을 다소 내려놓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 한편이 매우 불편하다. 그래서 이 책이 오랜 기간 금서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