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도서관에서 잠시 커튼을 내렸다 올렸다.
교사로서 14번째 맞이하는 새 학기 시작이라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나에겐 너무 바쁜 3월이다.
경력이 많을수록 생각도 쌓여가고, 생각 따라 몸이 움직이니 시간은 쪼개진다. 신규교사로서 참여했던 연수에서
"아침에 아이들을 만날 때면 100미터 달리기에서 '출발'신호가 울리는 것 같아요.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하루가 끝나 있더라고요"
라고 했던 나의 대답은 1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하다.
학교에 오며 가며 짬이 날 때 자꾸 나도 모르게 유튜브만 클릭하려는 나를 다잡고자 책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책을 언제 봐??"
현실적인 문제다.
작년까지 나름 책 좀 본다는 책부심을 장착하고 학생들과 학부모님, 주변 친구들에게 맥락에 맞는 책도 소개하고, 나름 독서 홍보 대사로 활약(?)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1번으로 오는 반응은,
'책이 좋다는 건 아는데 시간이 없어요...'
맞아, 그렇다. 짬이 나면 읽는 게 아니라 짬을 내서 읽어야 하는데 그 짬은 도대체 어디서 내야 하는 걸까?
나도 나에게 질문을 해봤다. 안테나를 세우고 출근을 하던 중 발견했다. 작은 도서관을..
바로 버스 정류장!
내 출근길은 일단 지하철을 타고 목동역까지 간 다음, 거기서 버스를 타야 하는 코스다. 그런데 버스 타이밍이 안 맞으면 최대 15분을 정류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지하철역에서 올라와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아가는 500m 정도의 경로를 나는 마치 미어캣처럼 6638번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경계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을 좀 바꿨다.
지하철을 타면서 읽었던 책을 6638번이 올 때까지 좀 더 읽을 수 있으니 오는 대로 타지 뭐 하고.
대통령 선거일을 하루 앞둔 3월 8일 아침. 전차책으로 박웅현 작가의 '책은 다시 도끼다'를 읽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요즘 다시 읽고 있다. 이 날 아침 밀란 쿤데라의 '커튼'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접했다.
현실은 커튼 밖에 있다.
짧은 순간 동안 이 문장은 삶의 산문 성을 가리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린다.
이 문장을 읽는데 예전에 참 좋아했던 싸이와 이재훈이 함께 부른 '아름다운 이별 2'란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힘없이 돌아서던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만큼 너도 슬프다는 걸 알아 하지만 견뎌야 해 추억이 아름답도록 밤하늘에 달도 별도 나에게는 별로 빛을 주질 않아 잘 보이지도 않아 얼마나 있다가 그대와 나 볼라나 이따가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보다 말도 안 돼 내가 미쳤나 보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니 미쳤나 보다 이별하고 나도 그래도 배고프다고 밥 먹는 걸 보니 나도 사람인가 보다
-아름다운 이별 2 노래 가사 중-
이별을 해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데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미쳤나 봐 하며 자책하는 이 노랫말을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했다. 현실적이니깐. 그런데 이 노랫말이 밀란 쿤데라의 '커튼'이었다. 커튼을 살짝 걷어올린 이별의 순간.
소설의 세계는 일상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다 걷어낸 커튼 앞의 근사한 세계라는 말을 듣고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킬킬거렸다. 6638을 안 타고 5012를 타면 어떻게 될까? 영등포역으로 가서 지금 막 떠나려는 KTX를 타고 미지의 장소로 떠나게 되면? 가는 길에 마침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응?
6638 버스 왔네.
출근할 시간이야.
들어가자, 현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