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로 피운 불 앞에서

by 정소정



우리집은 벽난로를 놓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요즘 난 매일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는다.


유튜브 벽난로 영상을 티비로 틀어놓고 있는 것이다. 원래 asmr 틀어놓고 글 쓰거나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큰 화면으로 볼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불 꺼놓고 이 영상을 틀어보니 왜 이제야 이 생각을 떠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좋다. 진짜 영락없는 벽난로다. 재생시간도 무려 열두 시간이나 돼서 외출할 때 혼자 남아계실 고양이분을 위해 틀어드리고 갈 수도 있다. 우리집 고양이는 꽤 취향이 고상하고 사운드에 민감한데 이 불영상이 맘에 드는지 틀어놓으면 그 앞에 가서 엎드려 불을 쬔다. 하얀 털이 불빛에 붉게 물들고 나무 타는 소리가 그 작고 뾰족한 귀에 타닥타닥 내려앉는 광경은 평화롭고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진짜 전원주택의 벽난로와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겠지만, 전원주택도 벽난로도 가져본 적이 없는 나와 내 고양이에게는 이 가짜도 충분히 좋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진짜를 경험하지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우리에겐 이 가짜가 진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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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디지털은 차갑고 아날로그는 따뜻하다고 한다. 물론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진짜 벽난로였다면 온기가 있었겠지만 나의 유튜브 벽난로는 약간의 우풍으로 시린 코를 따뜻하게 데워주진 못 한다. 차가운 디지털인 것이다. 하지만 그 영상 덕분에 내 작은 방은 붉게 물들고 무엇보다도 듣기 좋은 장작 타는 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그 빛과 소리만은 부재하는 온기를 마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전기가 만들어낸 온기인 온수매트의 그것과 결합하면 세상 아늑하다. 디지털의 환영이라고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 훨씬 좋다. 이 순간만큼은 어느 부자집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은 사모님보다 내가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0과 1로 만들어진 디지털 세상은 온도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게 이어져있고 만질 수 있는 아날로그 현실은 그보다 더 차가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만져봤을 때는 따뜻한 불빛인지 모르겠지만 영원히 내것이 아니라면, 그 온기가 과연 온기라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글을 읽은 우리들 대부분은 ‘나의 벽난로’라는 것을 평생 열심히 살아도 가지지 못 할 수도 있다. 그 아날로그는 디지털보다 차갑다. 아파트 안에 주민만 사용할 수 있는 멋진 운동시설과 사우나, 식당까지 갖춘 서울의 신축아파트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 게다가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고 만져지고 온기도 있는 진짜인데 그 어떤 가짜보다 더 가짜같다. 최근 몇 개월 사이 아파트 가격이 수 억 오르는 걸 포털을 통해 수치로 보다보니 이 세상 모든 아파트들이 판타지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좋은 아파트를 갖겠다는 꿈을 꾸기보단 차라리 열심히 벌어서 조금 더 큰 모니터를 사서 거기에 고급 아파트 영상을 틀어놓고 그걸 보면서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내 눈앞에는 꽤 큰 불이 꺼지지 않고 잘 타고 있다. 이 가짜는 빛과 소리로 존재하고 만지거나 온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진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환영이라 해도... 착각이라 해도... 우리에게 일부나마 행복의 빛과 소리를 허락해주고 있다.


디지털은, 그래도 0과 1은... 따뜻하다.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진짜, 절대 나에게는 곁을 주지 않는 값비싼 리얼월드보다 0과 1이 허락해주는 빠르게 깜박이며 점멸하는 페이크월드가 나에게는 더 진짜 같고, 더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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