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시간들, 그리고 그 곁에 놓인
고양이란 대체 뭘까?
동물 고양잇과의 하나. 원래 아프리카의 리비아 살쾡이를 길들인 것으로, 턱과 송곳니가 특히 발달해서 육식을 주로 한다. 발톱은 자유롭게 감추거나 드러낼 수 있으며, 눈은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애완동물로도 육종하여 여러 품종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속한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 '사전적 정의'는 그 대상에 대해서 정말 중요한 정보는 말해주지 않는다. 사전이란 삼라만상의 진짜 의미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놓은 일종의 눈속임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진짜 고양이란 뭘까? 지금 이렇게 질문하는 와중에도 열여섯 살 먹은 나의 고양이는 내 곁에서 싹싹싹싹 소리를 내며 자신의 털을 내 엄지손톱만한 혀로,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작은 혀에 돋아난 그보다 더 작은 돌기들로 핥고 있다. 나는 나의 고양이가 저렇게 열심히 자신의 털을 핥고 또 핥는 모습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시간이 좋다. 고양이가 털을 핥으면, 혀가 지나간 자리만 젖어서 털이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지며 솟아오른다. 둥글고 너울진 모양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드러운 파도의 끝자락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고양이란 뭘까? 대체 고양이라는 게 뭐길래 이토록 우리를 매혹시키고, 또 우리에게 그 생김새만으로도 큰 위안과 열락의 세계를 허락하는 걸까? 대체 왜 그 어이 없이 작은 몸으로 우리의 숭배를 받는 걸까? 무엇때문에 고양이 입으로 사료가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어도 내 배가 다 부른 걸까?
우리는 고양이라는 소동물의 호동그란 눈망울과 보드라운 털에 반해서 고양이를 키우거나, 고양이 사진을 들여다 본다. 나 역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양이 보기를 좋아했다. 우리집 담 너머에 살던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해가 뜨고 지는 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고, 온종일 그렇게 벌 받는 것처럼 서있어도 다리가 아프거나 앉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고양이는 꽃보다 더 예뻤다. 어머니가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이 모두가 다 그 누구도 이름을 붙여준 적이 없는 고양이들일뿐이었다. 들에 핀 꽃처럼 누구 하나 씻겨주는 이 없어도 예쁜 생명체. 그리고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나에게는 항상 '나의 고양이'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스무 살 이후의 내 시간은 고양이 없이 떠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고양이가 무엇인지 정의할 지적인 능력은 나에게 없지만 -없어 보인다. 더 노력해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힘들 것 같다. 역부족이다 - 나에게 '나의 고양이'가 무엇인지는 정의내릴 언어는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건 내 모든 시간들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 변함없이, 믿음직스럽게 놓여있는 '시간'이다.
사람의 시간이란 참 간사해서 자꾸만 그 얼굴을 바꾼다. 내가 원해서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도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어김 없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떠나고 그와 함께 흐르던 시간은 멈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시간 곁에 놓인 거의 스무 배는 더 작고, 비교할 수 없이 보드라운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흔히들 '죽음'이라 일컫는 생명의 시간이 다 하기 전까지는... 아니, 죽고난 뒤에도... 늘 따뜻하게 내 곁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나의 고양이란 내 모든 시간, 그리고 그 곁에 놓인 3.9킬로그램의 작고 연약한 시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