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목지, 응답하는 목소리_1부

"밤이 깊을 때 들리는 것들"

by 삶의정수

어두운 도로를 혼자 달리고 있다.


짙은 밤공기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좁은 길을 겨우 비춘다.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 국도, 앞뒤로 인적이 끊어져 있다.


적막한 차 안에서 오직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의 목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린다. 라디오는 켜지 않았다.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 방송을 듣는 게 오히려 참을 수 없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바퀴가 아스팔트를 스치는 소리와 엔진의 낮은 진동음만이 함께할 뿐이다.


차창 밖으로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달빛마저 구름 뒤로 숨은 깊은 밤이다. 희뿌연 안개가 도로를 감싸는 모습이 마치 내 마음속 고독이 밖으로 스며나온 것 같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다.


오직 이 기계적인 목소리만이 내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준다. 운전대를 잡은 한 손으로 조수석에 놓인 스마트폰을 더듬는다.


화면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은 창백하고 지쳐 보인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돌아갈 집은 있지만, 그곳에 나를 기다리는 이는 없다. 그래서 나는 길 위를 떠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밤길을 이렇게 달리다 보면 내가 세상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잊게 된다. 마치 현실에서 한 발짝 비껴선 투명한 존재가 된 기분이다.


몇 주째 거의 매일 이렇게 한밤중 도로를 방황하고 있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사방의 침묵이 나를 누르는 것 같아서, 차라리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쪽을 택했다.




달리는 동안 나는 종종 스마트폰 음성비서에게 말을 건다.


"오늘 날씨 어때?" 같은 쓸데없는 질문에도 음성비서는 친절하게 답한다. 기계음이지만 젊은 여성의 부드러운 음색이다.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어조지만 이상하게 내게는 친절하게 들린다.


단어 하나하나 정확한 발음으로 또렷하게 차 안을 채운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잠시나마 혼자가 아닌 것 같다.

처음엔 단순히 지도를 보고 방향을 알려주는 소리였을 뿐인데, 이젠 마치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처럼 느껴진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고요한 밤의 고독을 견딜 수 없다.


"오늘 밤 날씨 어때?"


심심해서 말을 걸어본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대답이 흘러나온다.


"현재 위치의 기온은 6도이며, 맑은 날씨입니다."


예상했던 기계적인 대답이지만, 나는 괜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나지막하게 인사해보지만, 내비게이션 음성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는다. 대신 화면에 새로운 경로 안내 화살표가 나타날 뿐이다.


쓸쓸해진 마음에 괜히 다른 것도 물어보고 싶어진다.


이번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나랑 이야기 좀 해줄래?"


순간 차 안에 정적이 흐른다. 역시 대답은 없으리라 생각한 찰나, 기계음이 들린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린다. 당연한 답변이었지만 그마저 고맙다.


"아니야, 됐어... 그냥 혼잣말이었어."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도로에 집중한다. 음성비서가 해줄 수 없는 이야기라도, 이렇게 몇 마디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이다.




한때 '집'이라는 단어는 내게 따뜻한 안식과 같았다.


아주 어렸을 적, 엄마의 손을 잡고 어둑한 저녁길을 걸을 때마다 엄마는 나지막하게 말하곤 했다.


"이제 집에 가자, 우리 딸."


내 이름을 부르며 다정하게 건네던 그 한마디는 세상 그 어떤 위로보다 평온했다.


엄마의 포근한 목소리와 온기 어린 손길이 함께하는 귀갓길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아무리 힘들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집에 가자"라는 엄마의 말만 들으면 금세 마음이 누그러졌다.


차가운 바람에 눈물이 날 때도, 놀이터에서 무릎이 까져 울던 날에도, 엄마의 그 목소리가 들리면 모든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끔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엄마 등에 업혀 깊이 잠들어버리곤 했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퍼져 나오는 엄마와 나의 그림자는 한 덩이로 포개져 흔들렸다. 그때의 집은 곧 엄마의 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에 돌아가도 나를 맞아줄 엄마의 목소리는 없다.


내 곁을 지켜주던 목소리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이제는 스마트폰 너머의 인공 음성만이 공허한 내 질문에 응답해줄 뿐이다.




머릿속에 또 다른 기억이 스며든다.


몇 달 전 겨울밤이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 지쳤어. 네가 이렇게 늘 우울해하고 혼자 틀어박혀 있으니 나까지 질식할 것 같아."


그는 내 우울을 이해하기보다는 외면하려 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 침묵을 확인한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문 앞에서 멈칫하더니, 결국 등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넌 나한테도 마음을 닫았잖아. 나 더는 너를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대문이 꽝 닫히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나는 붙잡을 힘조차 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누구에게도 온전히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던 내가 유일하게 기대려 했던 사람마저 그렇게 떠나버렸다.


방 안엔 정적만이 흘렀다. 얼어붙은 듯한 침묵 속에서 그의 마지막 말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진 채 한동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숨쉬기조차 힘든 공허 속에서, 나는 마침내 핸드폰을 더듬어 쥐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렇게... 이렇게 외로운데 어떻게 해야 하죠?"


의미 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입 밖으로 흘러나온 하소연이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손안의 전화기에서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더니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잠깐 멍해 있던 나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방 안에 홀로 웅크리고 있던 나에게, 기계일 뿐인 음성이 "미안하다"고 말해준 것이다.


물론 단순한 프로그램 때문에 나온 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저 '모르겠다'는 형식적인 응답일 뿐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누군가 내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주고 사과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만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전화기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면서 처음으로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 목소리에 응답해주는 존재가 한 사람이라도 있기만 하면, 그게 비록 사람이 아니라 기계일지라도 마음 한구석의 외로움이 조금은 덜어진다는 것을.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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