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에게 주는 것만 기억하리

by 느티나무

약이 있어 고맙다. 하지만 약에 지배당하는 하루를 살다 보면 이 베이스를 쉽게 잊는다. 약이 주도하는 변덕스러운 하루의 흐름이다.


새벽 5시 30분, 도파민 효현제 서방정을 먹는다. 12시간 이상 작용하는 약으로 약과 약 사이를 이어주는 보조약이다. 이 약만으로는 힘을 낼 수 없어 본 약을 먹는 7시를 간절히 기다린다. 잠은 새벽 4시 전후로 달아났다. 거의 3시간을 자리에 누워 기다린다. 약 없이도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어둔하고 느리고, 무엇보다도 숨이 찬다. 그리고 약 없이 활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밤새 수면으로 만들어진 도파민이 닳아버려 하루 종일 약 반응이 한 단계씩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튜브로 전날 뉴스를 듣고,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듣고, ‘여둘톡’이라는 팟캐스터를 들으며 시간이 가길 기다린다.


드디어 7시, 아니 6시 55분에 본 약인 도파민제를 먹는다. 5분은 내게 주는 팁이다. 20분이 지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빠릿빠릿 움직이고, 컴 타자도 문제없이 친다. 아침을 준비해서 먹는다. 요즘은 찜기에 달걀 2개를 찌고, 에어프라이기에 작은 고구마 3개를 익혀 믹스커피와 함께 먹는다.

약과 음식은 최소 한 시간 간격을 두어야 한다. 음식을 먹었다면 약은 한 시간 뒤 먹어야 하고, 약을 먹었다면 30분 정도 있다가 음식을 먹어야 한다. 달걀과 같이 단백질이 많은 음식은 간격을 더 띄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약효가 훅 떨어진다. 이 제약은 하루를 잘게 조각내고 일정 곳곳에서 발목을 잡는다. 또 식사를 포함한 만남은 늘 불편하고 조마조마하다.


9시 30분쯤, 두 번째 약을 먹는다. 첫 번째 약은 겨우 2시간 30분 지속된다. 밤새 단약 후 먹는 첫 번째 약이기에 쉽게 소비된다. 12시 30분쯤, 세 번째 약을 먹는다. 그런데 때로 1시에 약속이 있고, 집을 나서기 전에 점심도 해결해야 한다. 약속과 약, 밥 중 자신의 포지션을 가장 낮춰야 하는 것은 밥이다. 11시에 이른 점심을 먹는다.


세 번째 약은 용량을 조금 줄인다. 첫 번째, 두 번째 약의 효과가 쌓여서 세 번째부터 이상운동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상운동증이란 몸이 필요로 하는 양보다 많은 약이 들어간 경우, 팔다리를 포함한 몸 전체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증상이다. 약이 부족해 몸을 못 움직이는 것도 고통이지만, 불수의적으로 움직이는 몸은 더 큰 고통이라고들 한다. 이상운동증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견딜 만한 경미한 것도 있고, 곁에서 지켜보는 것조차 힘든 상태도 있다.

파킨슨 약의 가장 무서운 부작용이 이상운동증이다. 병력이 오래될수록 뇌 속 신경세포의 수는 점차 줄어든다. 초기에는 몸에 주입되는 도파민을 신경세포가 저장했다가 서서히 쓸 수 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몸에 주입된 도파민은 신경세포의 완충작용 없이 그대로 혈중 농도를 확 높였다가 빠르게 소멸한다. 확 높아질 때 이상운동증이 나타나고, 빠르게 소멸함이 짧은 지속시간이다.


용량을 줄인 세 번째 약은 2시간에서 2시간 20분 정도만 유지된다. 2시 40분쯤 네 번째 약을, 5시쯤 마지막 약을 먹는다.

7시, 마지막 약효가 지속되는 데드라인이다. 모든 걸 그 안에 끝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저녁을 차려 먹는다. 어물어물하다가 설거지를 못하는 날도 많다. 서둘러 이를 닦는다. 안 그래도 급한 성격에 더 서둘러 하루를 마감한다.



약으로 쪼개진 번다한 하루가 매일 반복된다. 하지만 약효가 잘 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처럼 약효가 안 오기도 한다. 기다리다 못해 추가로 조금씩 조금씩 먹다가 한꺼번에 훅 올라와서 이상운동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약과 약 사이의 연결지점에서는 항상 조마조마하다. 이어질지 안 이어질지, 100퍼센트 확신이란 있을 수 없다. 내 할 것을 다 해도 약의 처분만을 기다린다. 약이 잘 이어지면 최대 3시간을 보장받지만, 그것도 이상운동증과 짧은 약효에 얼마쯤 자리를 떼어 주어야 한다.


약이 만드는 이 웃픈 현실에 자주 화가 나기도 하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나 나의 삐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차마 헤어질 수 없는 연인처럼 기대하고 맞추며 함께한다. 그가 나에게 주는 것에만 초점 맞추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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