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곡밥의 팔 할은 쌀이다

by 느티나무

일요일 공부모임 주제는 ’선과 악‘이었다. 주제를 다룬 몇 가지 문항에 자신의 생각을 미리 적어가야 한다. 다음은 그 문항 중 일부다.


1. 나에게 선이란 무엇인가?

2. 다른 사람의 선함을 보면 내게 어떤 것이 일어나는가? 한 가지를 고르고 그 이유를 써 보자.

(1) 너무 멋있고 나도 배우고 싶다.

(2) 나와 동떨어진 느낌으로 자괴감이 든다.

(3) 깎아내리고 싶고 왠지 싫다.

(4) 남의 선함을 신뢰하지 않는다.

선을 정의하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문제는 ’나에게’ 선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좋은 것, 필요한 것,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을 묻는 것이다. 나는 나로서 바로 서는 것이 선이라고 썼다. 또, 바로 선다는 것은 일어나는 상황을 바로 보고 내 것을 책임지는 모습이라고도 했다.

2번 문항에서는 (2) 번 보기를 보며 깔끄러운 것이 보드라운 살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마음, 내 안에서 허용하지 못하고 눌러둔 마음이 건들렸다. (1) 번도 기본으로 있었으나, (2) 번도 있었다. 하나만 고르라는 조건을 생각하며 (2) 번을 썼다.

조별 토론시간에 생각을 나누었다. 2번 문항에 나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1)을 선택했다. 한 사람은 자신에게 선함은 지혜이고, 깊은 지혜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역사 속 성군의 예를 들며 역시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2) 번을 꼽은 뒤 ‘선하게 살아오지 않은 내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없이 선한 사람을 보면 위축감이 드는 것은 맞습니다.’ 하고 말했다. 조장은 내 말에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 하며 낯설어한다. 그리고 좀 더 다른 부분은 없냐고 물었을 때 나는 (1) 번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겨우 답했다.

이런 대화가 오가던 중 나는 또 부끄러워졌다. 결국 (1) 번이 정답이라는 말이구나, 내가 틀렸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구나... 선하고 바람직한 사람들 틈에서 나만 동떨어져 있다는 (2) 번의 느낌이 또 왔다. 여기서 공부를 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의 봄볕은 환했지만, 내 마음은 어두웠다. 무엇을 해도 부끄러움이 남았다. 다른 사람의 선함을 ‘좋구나’ 단순하게 봐주지 못하고, 나의 ‘불선’을 먼저 떠올리는 자기 중심성이 부끄러웠고, 그런 자기 중심성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나의 위선이 부끄러웠고, 이제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자는 마음으로 마음 구석에 꾹꾹 눌러둔 것을 펼쳐 보였지만 나만 정답에서 비껴간 것 같아 부끄러웠다.


며칠 후 나는 이 문제를 다시 공부모임에 내놓았고 선생님들께서 선과 악으로 풀어주셨다. 그걸 정리해 본다.

다른 이의 선함에서 배우고 싶은 마음도, 위축감도 그 어느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우리 마음에는 어느 하나만 있지 않다.

배우고 싶은 마음의 자리가 있고 위축감의 자리가 있다. 각자의 것으로 존재한다.

나는 둘을 분별하고 나눈다.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그래서 좋은 것만 되려고 한다.

나를 끊임없이 검열한다.

나에게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다.

위축감이 섞인 배우고 싶은 마음은 인정할 수 없다.

순도가 떨어지는 그것을 부정한다.

나는 위축감만 있어, 그렇게 스스로를 정의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배우고 싶은 마음을 쓴 사람들 틈에서 또 힘들어진다.

내가 선택해 놓고, 좋지 못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되려고, 1 급수의 깨끗한 물이 되려고, 끝없이 선한 사람이 되려고...

이게 내가 움직이는 방향이었다.

그러나...

나만 좋은 것이 되려는 것이었고, 선이 아니면 다 부정해 버리는 극도의 악함으로 가는 길이었기 쉬울 것이다.

선생님들이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어떠한 모습의 나라도 허용해 주고 그럴 만했다고 인정해 주면, 그 푸근함이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을 녹이고 외부에도 흘러갈 것이다. “




밥이 다 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린다. 밥솥을 여니 따뜻하고 부드러운 밥이 김을 내고 있다. 약간의 잡곡을 섞어 지은 밥이다. 잡곡에 초점 맞추면 잡곡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나, 팔 할은 하얀 쌀알이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하얀 쌀알처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떠올린다. 또 잡곡도 쌀알도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가며 함께 ‘밥’ 임을 잊지 않는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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