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다, 고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다 보면 가끔씩 듣는 말이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예쁘다는 말로 들렸다. 오늘은 화장이 예쁘게 됐구나, 오늘은 옷을 예쁘게 입었구나, 뭐 이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초췌해 보이는 꼴로 서 있어도 곱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런 갸웃거림은 끄덕거림으로 바뀌었는데, 아장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였다. 아기 입에 무언가 묻어도, 콧물이 질질 나고 있어도, 그 자체로 귀여운 것임을. 나이 들고 여러 경험이 여물어가면서 알게 됐다.
여전히 곱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이가 들어감에도 나보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콧물 나는 아기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일 테니 그들에게 난 언제나 귀엽고 예뻤다. 쭈굴 하게 주름진 할머니의 시선엔 아득한 부러움이 느껴진다. 어떤 할머니는 어느새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자신의 손녀딸마냥 내 손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순간 덮혀지는 거친 손길이 나는 왜 좋은 것인지, 갑작스러운 고백에 덩달아 승낙하듯 나도 할머니께 웃어 보인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호구조사하듯 내게 여러 질문을 하시기도 하는데, 어디서 왔는지, 지금은 어디 가는지, 부모님은 무얼 하는지 등을 차례차례 답해드리기도 한다. 사실 그런 것들이 정말 궁금한 것도 아닐 거면서,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해야지만 본인의 외로운 시간들이 한 정거장씩 지나치는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나도 혼자, 이렇게 쓸쓸하려나 생각이 든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어가고 있다. 나이먹음이라는 것이 언젠가는 너무나 간절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더디 갔으면 한다. 늘어나는 흰머리나 건조해지는 피부를 볼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평하게 째깍거리는 시간이 아쉽다. 어떻게든 나이를 감추려고 어른들 화장을 하던 때도 우리에게 있었다. 눈 두덩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 새도우를 한 겹 두 겹 덧바르던 때가 있었단 말이다. 이제는 어떻게든 젊어 보이려고 젊은 이들의 볼터치를 따라 한다. 두 뺨의 광대 위치를 잘 잡아야지만 발그레함이 전해질텐데, 볼터치에 실패하고 나면 눈 밑 애교살이라도 그린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우리는 펜 끝에 의지한다. 그러니 나이 든 노인들의 시간일랑 얼마나 서러울까.
젊음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모든 것이 용인된다. 무얼 하지 않아도, 혹은 무얼 하더라도, 모든 게 너그럽게 기회와 용서가 주어졌다. 그래서 스물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서른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 어른들은 말한다.
"곱다, 고와. 너 자체로 아름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