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것에 대한 로망이 생긴 것이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어떤 영화에서 본 여배우의 지적이고 우아한 행동에 반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상적인 모습에 반해 나도 그들처럼 무드있게 커피 한 잔 내리고, 미리 정해놓은 내 자리에 앉아 오늘도 노트북을 열어본다. 하지만 이내 곧 현실에 부딪히고 오늘도 머리를 쥐어뜯는다. 대충 묶어 올린 엉켜버린 머리카락들처럼 머릿속에 떠다니는 언어들은 온전한 문장의 마침표까지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
글쓰기 초반, 나는 글을 쓸 때 ‘멋’이라는 조미료를 쳤다. 그건 작가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처럼 내가 생각했던 글 쓰는 자의 ‘분위기’ 같은 거였다. 가령 어떤 것을 보고 ‘슬펐다.’라고 말하는 대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라고 쓰는 것. 조금의 거짓이 포함된 글. 조미료를 너무 치면 음식 본연의 맛이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 주부가 글의 겉멋에만 빠져서 그것이 진짜 글의 맛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유는 급했기 때문이다. 이미 1인 1 책의 시대가 도래했고 남들과 다른 무언가라도 있다면 쉽게 출판의 길이 열리는 이 시대에, 나의 삶은 불행히도 딱히 특별하거나 남다른 환경에 처한 적이 없었고, 나 역시 흐르는 대로 나를 줄곧 그대로 두었다. 같은 육아를 하고 있어도 아이들 교육이며 요리며 인테리어까지 완벽한 엄마, 화려한 경력의 회사를 단번에 그만두고 새롭게 창업을 하는 도전적인 사람. 그들이 책 한 권을 쉽게 손에 쥐는 동안 나는 안절부절 내 자리를 뺏긴 것처럼 불안했던 것이다. 그들처럼 되려면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라도 다녀와야 할 판이었다.
투지만 넘쳐 페이스 조절을 하지 못하는 초보 복서처럼, 나는 링 안에서 무작정 밀어붙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기회를 노리며 한 방의 펀치만 바라보고 있는 검은 야욕이 스멀스멀 눈에 보이기까지 하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결국은 경외감이 드는 작가들의 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정면돌파만이 답이라는, 즉 나의 진심이 쓰여진 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계속 나에게 자문하고 자답한다. 갑자기 철학자가 된 것처럼 존재하는 것들에 가치를 매기고 작은 생각이라도 소크라테스식 발문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사물을 볼 때 평소보다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자꾸만 나는 걸음을 멈추는 일이 많아진다. 생각이란 것을 하다 보면 죽어있는 사물도 새롭게 생명이 생기는 듯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글을 쓰면서 느낀다.
마침 재밌게 읽었던 전보라 작가의 연애소설 <연애가 끝났다>가 생각이 났다. 책에서 남자 주인공 혜영은 좋아하고 있는 여자 주인공 담이가 그동안 추억상자 속에 모아놓은 것들을 버리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그 안에는 당신도 있잖아요. 당신이 기억해야 하는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누군가를 충분히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던 당신
우리는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나 자체로 특별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어쩌면 모두 다 다른 경험이지만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 글이 어떤 이에게는 평범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특별함으로 남길 바라며 진심만 담아내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담이의 추억상자처럼 나의 글도 나를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라도 되기 위해서 나는 써야 하지 않을까?
핸드폰은 가끔 잊었던 기억을 우리에게 소환시켜주기도 한다. 알람으로 1년 전 사진, 3년 전 사진 등 뭉텅이의 추억을 다시 꺼내보라고 권유받는다. 희미한 기억이 궁금해서 그 사진들을 열어보면 그때가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기계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 회기 되는 세세한 기억은 결국 나의 몫이다. 그 기억을 위해 나는 써야 한다. 나의 감정과 나의 삶이었던 반짝반짝한 날들을 훗날 추억 상자에서 꺼내 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말이다. 어린 날의 사탕반지가, 때 묻은 인형이, 수줍은 다이어리가, 사랑을 표현했던 문자메시지가 분명 그리울 때가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