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워킹맘
월요일은 원래 힘들고, 화요일은 화나니까 힘들고, 수요일은 수틀리게 힘들고, 목요일은 목 빠지게 힘들고, 금요일은 금방 가니 힘들고, 토요일은 토할 것 같아 힘들고, 일요일은 일할 생각에 힘들다.
이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당신은 매일 주어지는 하루가 의미 없이 흘러가는 똑같은 하루처럼 느껴질 테다. '월화수목금금금'처럼 느껴지는 일상에서 과도한 노동시간과 불평등이 공존하는 건 직장인에게도, 전업주부에게도 격한 공감을 나타내기에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외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럴 때 재충전의 의미로 각자의 휴가를 잘 써먹으면 좋은데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는 걸까?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주말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공복에 갑상선 호르몬제를 한 알 삼키고, 멍하게 잠깐 '타임아웃'되는 시간이 존재하는데, 때마침 남편이 그때 내게 말을 걸었었나 보다.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엔 뭐할까?”
".....”
듣지 않으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잠깐의 비어있는 침묵에 남편은 갑상선 호르몬제로도 컨트롤할 수 없는 아내의 뒤죽박죽 한 호르몬을 감지하고,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뜻밖의 제안을 했다. 1박 2일 나 혼자서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 혼자라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처방전인가! 주말에 몇 시간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혼자 카페에 가본 적은 있었지만 혼자서 여행이라니.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살짝 겁이나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서 노트 제일 윗줄에 '하고 싶은 것'이라고 적어봤다. 흘러넘치게 리스트를 적고 싶었지만 막상 적으려니 눈앞에 보이지만 잡을 수 없는 무지개처럼 허망했다. 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단념에 익숙해졌던가. 그러고 보니 엄마라서 포기했던 것은 결코 나의 경력뿐이 아니었다. 식사를 할 때에도 나는 다른 식구들이 먹지 않는 반찬들에만 손을 댔다. 혹여나 밖에서 힘들었을 남편과 아이들이 당연히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단 생각으로.
그렇게 배려하는 게 익숙해지면 어느새 음식의 따뜻한 온기는 사라지고, 남은 음식을 잔반 처리하듯이 먹는 날도 있었다.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순 없지만 서운한 것들이 나에겐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왕창 먹고 다니리라!
급하게 서둘러 먹지도 않고, 온전하게 한 음식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순간부터 만끽하며 먹는 여유! (혹은 그런 음식보다 그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그렇게 나는 크리스마스에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급하게 기차표를 예매하느라 일정은 토요일 아침에 나와 일요일 밤에 도착하는 꽉 찬 1박 2일 여행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내가 없는 동안 총 6끼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지만 나는 오롯이 혼자라는 생각에 일말의 양심도 나중으로 미룬 눈치 없는 '연차'를 쓴 것이다. 전날 잠이 오질 않았다.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점점 설레었는데, 이마저도 남편에게 속마음을 들킬까 표정을 숨긴 채 눈만 감고 있다가 동이 텄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바닷소리가 들리는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목도리와 장갑, 핫팩으로도 버틸 수 없는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아리게 강타하는데도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막힌 목구멍에 사이다를 들이부은 것 같은 시원함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에 혼자 있어도 전혀 혼자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였더라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찍어 주느라 바빴을 나의 몸은 유유히 걸으며 바다를 원 없이 보는 것으로 끝났다. 실컷 바다를 본 후에는 바닷가를 등지고 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정해놓은 곳이 없이, 무작정 들어가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크림소스가 찐한 감자 뇨끼를 먹었고, 온전한 한 그릇은 내가 먹기에 많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오래도록 수저와 포크를 놓지 않았다.
후엔 미리 찾아본 부산의 독립서점을 찾아갔다. 어느샌가 여행을 가면 그 지역에 있는 책방을 꼭 가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혼자 온 여행에서도 당연한 것이었다. 독립서점은 책이 진열되어 있는 방식도, 풍기는 이미지와 조명의 명암도 전부 달라서 가봐야 할 곳들이 많았다. 뚜벅뚜벅 걸어서 도착한 책방에서 한참을 책 구경을 하다가 읽고 싶은 책을 사서 그 자리에서 3-4시간을 훌쩍 보냈다. 가족들과의 여행에선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틀 동안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여행의 후기담이 궁금했는지 찍어놓은 사진들을 살펴봤다.
"뭐야! 사진이 이게 다야?”
생각보다 나 홀로 여행은 배고픔도 잊게 했다. 부산의 독립서점과 그곳에서 만난 책 때문에 자꾸만 식사시간이 휘발되었다. 어쩔 땐 밥 대신 커피를 마셨고, 추위를 달래줄 도수가 센 수제 맥주를 책과 함께 하거나 따뜻한 '글루바인' 한 국자를 얻어 마셨다. 남편은 여행하는 동안 먹고 싶은 것들 많이 먹고 오지 그랬냐며 혀를 내둘렀지만 난 그것으로도 충분했나 보다. 여행 내내 먹은 음식의 양보다 읽은 활자가 더 많았을지라도 이럴 땐 '양보다 질'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행 중에 읽은 책 중에 가슴에 스며드는 말이 있었다.
'인생에서 좋아하는 것 1가지를 누리기 위해서 좋아하지 않는 것 9가지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운다. 1가지를 추구하기 위해 9가지를 견뎌내는 것의 반복이 삶이라는 것'
- <아무도 없는 바다, Nobody in the Sea> 중에서 -
혼자여서 좋았지만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가족에 대한 애틋함도 분명 존재했다. 먹었던 음식들은 나 혼자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라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휴가에 나는 스스로를 토닥여주는 법을 배웠고, 나의 취향을 더 깊이 알게 되었으며, 일상에서 겪게 될 아홉 가지 일들을 감수하기 위해 한 가지 더 큰 에너지를 채우고 왔다. 여행 가면서 카메라 이외에는 어떤 짐도 챙기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짐이 6개로 늘었다. 대부분 가족을 위해 소품샵에 들릴 때마다 사 모은 것들, '엄마 손맛'을 느끼게 해 줄 싱싱한 식재료들과 간식들, 그리고 나를 위한 몇 권의 책이었다.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힘이 든 날들이 자명하게 나타날 테다. 하지만 '휴가'를 통해 느낀 가슴 충만한 감사함을 아로새기며 또다시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 돌리고, 또 돌릴 것이다.
이제는 엄마 출근하겠습니다.
#낫워킹맘 #엄마에세이 #일하지않는엄마가하고있는일 #혼자만의시간이필요한엄마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