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워킹맘
얼마 전 고메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볼 기회가 있었다. 6년을 키운 아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 아이(류세이)는 똑똑하고 부자이지만 무심한 아버지의 아들로 살고, 한 아이(케이타)는 지방에서 작은 전파사를 운영하는 가난하지만 정 많은 아버지의 아들로 산다. 6년 만에 친 아들을 찾았지만 부모들은 선뜻 결정할 수가 없다. '피와 시간' 어느 쪽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유다이(릴리 프랭키)씨에 비하면 다소 무정한 아버지로 나온다. 자신에 비해 뭔가 부족한 아들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하고 가정보다는 일이 더 우선인 아버지다. 하지만 나는 료타가 나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일 뿐인데 유다이와 자꾸 비교돼서 인지 매정한 아버지로 비쳐졌다. 오히려 유다이 같은 아버지가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동네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며 세 아이에 치매 걸린 아버지까지 함께 살면서 다소 지질한 면도 있고 돈도 밝히는 캐릭터인데 아이들에게만큼은 최고의 아버지라고? 요즘 그런 아버지가 정말 있을까? 삶에 찌들 대로 찌든, 그래서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에 한없이 작아지는 아버지들이 더 현실적인데.(아! 유다이씨는 영화 속 인물이었지?)
사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누가 더 좋은 아버지냐를 가리려는 게 아닐 것이다. 아이의 진짜 마음을 알아가면서 부자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아버지라 불릴 수는 있지만 아버지가 되는 건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영화는 말해준다. 그런데 과연 아버지만 그럴까? 엄마는?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가 되는 걸까? 9개월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었기에 아빠들보다는 좀 더 가까운 시점에서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도 처음부터 완전한 엄마는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좀 불편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유다이 엄마가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근데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난 엄마인데...”라고 말하는 씬인데 모임에 다녀온 남편(료타)에게 미도리가 묻는다.
"다들 내 얘기 뭐라고 안 했어? 엄마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이가 바뀐 지도 모르고 6년을 지낸 엄마 자신에 대해 자책하는 미도리의 말이다. 내가 만일 결혼 전이었거나 아이를 낳기 전이었다면 나도 미도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자기 아이가 바뀌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지? 그리고 아이가 바뀐 걸 알았으면 당연히 다시 바꿔야 하는 거 아냐? 특히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케이타 입장에서는 억울한 거 아닐까?(과연 그럴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런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다는 걸. 엄마라면 더욱더. 엄마니깐. 엄마는 그런 존재니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엄마인 나는 솔직히 아빠보다 엄마에게 더 관심이 갔다. 미도리와 유카리. 두 엄마의 모습 속에서 누가 더 나은 엄마인지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면서 영화를 본 것이다. 나는 또 어느 쪽 엄마에 가까울까. 만일 내 아이가 바뀐 거라면 어느 엄마 밑에서 자라는 게 더 좋을까? 영화가 끝나고도 선뜻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어느 엄마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들 또한 많은 시행착오 끝에 좀 더 나은 엄마가 되어갈 뿐이니까.
엄마들도 초보 엄마라고 써 붙이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능수능란하게 할 수 없으니까. 아이와 같이 눈물바다를 이루면서 엄마도 아이와 함께 성장할 뿐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만만의 준비를 하지만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다. 엄마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가족은 피보다 시간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가 되기 위해선. 가족이 되기 위해선. 엄마도 시간을 먹고 그렇게 엄마가 된다.
우리는 어른이 된 그 아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들을 결속하는 것은 피도 유전자도 아닌,
다만 함께 보낸 수천 번의 나날들, 말과 몸짓, 음식들, 차를 타고 다닌 거리,
의식한 흔적 없는 다수의 공통된 경험들의 현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에르노의 <세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