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라는 책갈피

과거의 나쁜 감정들은 희석되고 좋은 기억은 견고해진다.

by 정선

우리 셋은 서로의 연락처조차 몰랐다. 그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명목 아래 페이스북으로 걸쳐져 있는 가느다란 관계였고 3학년이 되어서야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취방을 구하는 중인데, 2학기에 같이 살래?"라고 묻고 "그래."라고 곧바로 대답할 수 있는 정도의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두 명의 룸메이트와 나는 이름, 사는 곳 외에는 깊이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 하지만 우린 수업이 끝나면 함께 저녁마다 부지런히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각자의 집에서 엄마가 챙겨준 반찬으로 상을 차렸다. 배를 따뜻하게 채우고 나면 밤중에 캠퍼스를 걷고, 음악을 듣고,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댔다. 때로는 고해성사하듯 각자의 과거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나도 그런 적 있어.” “나는 더한 것도 겪어봤다 야,“ 하며 서로의 이야기에 이야기를 쌓았다. 같이 사는 친구의 고민과 아픔을 지나치지 않고 함께 끌어안아주었다. 기쁜 일이 있으면 다 같이 축하했다. 우리는 하루를 단 한시도 공허하게 보내지 않으려 애썼다. 밤산책을 다녀와선 다 같이 드라마를 보고 나란히 누워 잠이 들 때까지 떠들었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사생활 그 이상을 공유했다.


대학생활 내내 힘들 때마다 친구들과 산책하며 듣던 노래들을 졸업 후 처음 마주하여 들었을 땐 마음 한 구석이 쓸쓸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힘들었던 과거의 마음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정말 별 거 아닌 일들이지만 대학생이던 나는 별게 아닐 정도로 어렸다. 그다음 해, 또 다음 해, 밤바람에서 가을이 조금이라도 오는 듯한 기미가 보이면 그때 그 노래를 또 꺼내 들었다. 마치 이번엔 얼마 큼의 통증이 남아있나 확인이라도 하듯 재생 버튼을 눌렀다. 신기하게도 여러 번의 가을을 맞을수록 그 노래들 속에 내가 확인하던 통증은 없었다. 다만 우리 셋은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때 어떤 하루들을 보냈었는지에 대한 기억만 선명히 남아있었다.


오늘 퇴근길에 위를 올려다보니 며칠 전 보다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도 제법 시원했다. '가을'이라고 저장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니 오랫동안 덮여있던 10년 전 책의 책갈피가 손에 잡혔다. 그리곤 대학교 3학년때로 페이지가 한 번에 탁 넘어갔다. 그 시절 룸메이트였던, 엊그제 임신 축하 선물을 전하기 위해 모였던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얘들아 오늘 날씨 딱 가을이야. 하늘도 너무 예쁘다. 왠지 우리 같이 살 때 생각나서 그때 듣던 Ship and the globe랑 비긴 어게인 영화 ost 듣는 중. 너네도 들어봐ㅋㅋ'


사는 동안 책갈피를 빼곡하게 꽂아둬야겠다 생각했다. 언제든 버틸 힘이 필요할 때 넘겨 볼 수 있게.

photo by.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