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오전,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복구가 곧 갈 것 같아 ㅠㅠ’
지난 주말부터 3일째 물도, 밥도 못 먹고 있는 복구였다.
아프면 낑낑거렸는데, 낑낑 소리도 못 내고 꼼짝도 안 한다고 했다.
‘엄마가 윤채 부를까? 했더니 몸을 살짝 움직이더라.’
주 양육자였던 윤채의 이름은 알아듣나 보다.
알람이 또 울렸다.
‘윤채가 그동안 잘해줬으니까 마음 편히 가라고 했는데 복구가 눈물 흘렸어. 윤채한테는 말 못 하겠다 네가 말해.‘
‘엄마 지금 아빠랑 병원 가야 해서 외출하는데 그 사이에 떠날까 봐 걱정이다.’
‘아빠는 왜?’
‘아빠 폐에 혹이 생겼대. 근데 엄마 수술하고 아프니까 아빠가 말 못 하고 있다가 이제 말해서 알았어.’
출근길 지하철, 길고 긴 환승 통로를 걷는 내내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기계적으로 걸었다. 마침 타야 하는 열차가 도착했고 사람들이 우르르 타는데 결국 나는 발걸음을 돌려 벤치에 털썩 앉았다. 가방에 있던 휴지를 주섬주섬 찾아 꺼내다가 휴지를 꺼내기도 전에 휴지를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복구며 아빠며 머릿속이 뒤엉켰다.
일 하던 동생은 반차를 쓰고 집으로 갔다. 그냥 느낌으로 오늘이 정말 복구의 마지막일 것 같았다. 동생이 집에 도착해 복구를 배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었다고 한다.
‘집 도착했어? 복구 어때?’
‘숨을 엄청 짧게 쉬어.’
출근은 해야 하니 발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자리에 앉아 눈에 힘을 주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문서 작업을 계속했다. 이성을 끄집어내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모니터 오른쪽 구석에서 노란 알람이 떴다. 읽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갔다.
‘엄마랑 아빠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복구 떠났어.’
떠날 것 같다는 예고를 백 번 했어도 추측이 아닌 완료형인 문장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큰 감정이 터졌다. 얼굴은 제 멋대로 일그러졌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도 상실의 슬픔은 너무나 새것이다.
10년 전, 우리 집에 복구를 데려왔을 때 이미 10살이 넘었었다. 그때도 곧 죽을 것 같던 상태의 복구였다. 그런데 점점 건강해지더니 다들 강아지가 사랑받더니 회춘했다고 할 정도로 쌩쌩했다. 난생처음 바다도 보고, 한강 공원도 가보고, 카페에서 강아지 친구들도 만나고, 못 해본 것들을 복구는 노인이 되어서 겪었다. 그런 복구였으니 강아지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21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건 사실 복이기도 하다.
동생이 복구의 영정사진을 골라달라고 했다. (강아지 영정사진이라니 단어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채팅창에 떨어진 수십 개의 사진 더미를 보자마자 또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중 가장 밝게 웃는 사진을 골랐다.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차를 타고 버려진 기억이 있어 그런지 복구는 차를 못 탔다. 우리와 사는 동안 조금씩 차 타는 연습을 했었다. 그리고 3년 전, 그러니까 같이 산 지 7년이 돼서야 자동차를 편안하게 탈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반려동물 장례 서비스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염까지 하고 수의를 깔끔하게 입힌 뒤 가족들의 손 편지를 함께 상자에 넣었다. 동생이 보내온 복구 사진에 눈물이 날 뻔했지만 ‘사람처럼 다 하네’ 대답했다. 수의를 입혀놓으니 앙상한 몸이 더 도드라졌다. 아니, 정말 백발의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은 모습 같아서 신기했다. 맨날 손도 못 대게 하던 지저분한 주둥이 털들은 그제야 가지런히 빗질이 되었다. 평소에 복구가 눈뜨고 세상모르고 자던 모습이랑 똑같았다. 떠날 때마저도 귀여운 주둥이의 모습에 울다가도 웃음이 났다. “강아지가 나중에 주인 죽으면 꼬리 흔들면서 마중 나온대요.” 옆에 있던 동료 선생님이 말했다.
“복구가 다른 강아지로 환생해서 우리 집에 왔으면 좋겠다.” 분명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에 더 이상 강아지는 없어.’라고 단언한 동생이 또 강아지를 키울 생각인 건가. ‘슬픔을 언제든 이겨낼 용기가 있다면야’라고 생각했지만 슬픔은 애초에 이겨내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이란 절대적으로 존재하며 필연적인 결말.
얼마 전 책을 읽으면서 개구리가 나에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나에게 선택권이 없는데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 나의 것이 아닌데 바라는 마음” 때문에 인간에게 상실과 비탄이라는 슬픔이 찾아오는 것이라 말한다. 죽음은 생명체 앞에 예정된 것이며, 삶의 당연한 과정이자 일면이기에 ‘내 삶을 잃어버렸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기다. 어차피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잃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겠다.’
상실을 직면하고 상실 앞에 선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라 관계는 지속되고 있으며 단지 변했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