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워진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에 대해
과하지욕 袴下之辱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을 참는다'라는 뜻으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대장군 한신의 젊은 시절의 일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큰 뜻을 지닌 사람은 쓸데없는 일로 남들과 다투지 않음을 빗대는 말이다.
위 고사성어에서 볼 수 있듯 누군가의 가랑이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굴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힘을 가진 이가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힘을 과시할 때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기게 하거나 무릎을 꿇게 만드는 등, 그가 자신의 발아래에 있음을 인지시켜주는 행동들을 강제함으로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고 그를 통해 자기가 가진 힘과 사회적 위치를 공고히 한다.
대한민국에서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9세기말 갑오개혁을 통해서이다. 그 후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신분제도의 기반이 붕괴하였고 그와 함께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신분제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요한 이념으로 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대우를 받고 권리를 누릴 수 있기에, 이제는 누군가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일은 원칙적으로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원칙은 그 원칙 안에만 머문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함께 정착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한국의 급속한 성장 동력이 되었다. 세계 최빈국에서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가파르게 성장해 온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살기 좋은 국가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빠른 성장 속에는 그만큼의 커다란 상처도 함께 남았다. 성장이 더뎌지며 더 크게 벌어지는 소득 양극화와 빠른 성장 속도에 따라가기 위해 강제되었던 개인들 간의 과잉 경쟁, 그리고 그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자본 만능주의는 현재 대한민국이 가진 여러 사회문제의 근간이 되었다.
현대의 우리는 자본으로 서로를 계급화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더는 크게 문제 삼지도 않는다. 여러 기업의 회장들이나 CEO들은 요즘 그 어느 유명인들보다 더한 스타 대접을 받는다. 예전과는 달리 기업인들도 SNS를 적극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에 따라 많은 팔로워를 몰고 다닌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들이 사용한 제품들을 따라 사용하기 바쁘고 그들이 방문한 공간들은 핫플레이스가 된다. 그들이 저지른 여러 경제범죄는 그들이 가진 자본과 권력을 통해 덮여 무마되고, 대중들은 그런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그들이 가진 자본력을 동경한다. 애초에 그들이 우리와 평등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인간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 그들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는 것이다. '가랑이 사이' 작품은 이렇게 계급화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 작품이다.
가끔 주변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다 보면 '돈 많으면 형'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잘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농담이다. 자본이 만들어낸 계급을 우리는 왜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자본주의적 신분제도에서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를 다시금 지켜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