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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21. 2022

9. 우리 옛것과의 만남

'한양도성'에 대하여

육백년의 신화 

    

2018년 10월 ‘한양도성문화제’가 열렸습니다.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巡城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세 차례나 순성을 하였고 영조도 도성에 올랐답니다. 원래 순성이란 관리 책임이나 감독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성을 둘러보는 것인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유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양 사람들은 하루해가 꼬박 걸리는 순성을 고대하고 고대하였다지요. 오늘날의 순성에는 600여 년의 시간이 동행합니다. 

           

“종묘는 조종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1394년 11월 3일


도성궁원都城宮苑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城高鐵甕千尋

구름 둘렀어라 봉래 오색이      雲繞蓬萊五色

연년이 상원에는 앵화 가득하고  年年上苑鶯花

세세로 도성 사람 놀며 즐기네   歲歲都人遊樂

            정도전,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서 

# 시간의 모자이크

『시경詩經』에 나오는 ‘建首善自京師始(으뜸가는 선을 세움은 서울에서 시작된다.)’에서 따온 ‘수선’은 서울을 뜻하기에 수선전도는 서울의 지도를 가리킵니다. 순우리말인 서울의 옛 말 ‘셔블’이 으뜸가는 도시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사는 도시인 왕도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수도요, 국가의 도읍지 국도이기 때문이지요. 

1395년 태조 이성계는 성곽 축성을 명합니다. 1396년 당시 서울 인구가 10만에서 15만 명 정도였는데, 전국의 백성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단 98일 만에 5만 9500척에 달하는 성곽을 건설하였습니다. 세종 대의 수축은 농한기에 전국 8도에서 무려 32만 명의 양인이 동원되었습니다. 숙종 때는 8년에 걸쳐 도성의 삼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 담당하였습니다. 

한양도성의 성곽은 땅에서 쑥쑥 자라난 듯 지형과 한 몸입니다. 능선을 따라서 오르고 내려오다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합니다. 성벽에 딱 붙어있다 멀찍이 떨어지기도 하는 순성길은 흙길이다가 계단이다가 도로에 막히면 멀리뛰기를 하여 이어졌습니다. 높이 5~8m에 이르는 성벽은 각지거나 굽어진 네모의 조합으로 얼핏 몬드리안이나 김환기 작가의 추상작품을 연상케 합니다. 

크기와 형태, 색의 농담으로 성돌의 ‘연식’을 가늠하며 돌을 다루는 기술과 축성술의 시대적 변화를 배워갔습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 사이를 작은 돌로 메운 곳과 크고 매끈해진 정방형 석재가 치밀하게 쌓인 곳들이 수백 년 나이차를 접어두고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습니다. 

     

# 모든 길은 서울로(路)

“성문을 너무 오래 닫아 땔감이 끊어진 지 오래고...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병들었으니... 문을 열도록 하소서.” 『연산군일기』 1504년 8월1일

“5경 3점에 사대문이 열리니

 말에 싣고 수레로 운반하며 떼 지어 오네

 무수한 생선, 소금, 무수한 채소류

 분분히 사러 좇아왔더니 벌써 다 팔리고 돌아가네.” 강이천(1768~1801) 『한경사漢京詞』

 

도성문은 도성 안의 삶을 좌지우지했습니다. 도로에 고립된 지금과 달리 닫으면 벽이고, 열면 길이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고 다시 흩어졌습니다. 19세기에는 새벽마다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우마차 행렬이 수백 대였답니다.  

어릴 적 노랫말에서는 남대문과 동대문이 12시가 되면 문을 닫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도성 문은 인정人定 종소리가 28번 울리면 닫히고(밤 10시), 파루罷漏 종소리가 33번 울리면 열렸습니다(새벽 4시). 28번은 28수宿 별자리에, 33번은 제석천이 이끄는 33천天에 알린다는 의미입니다.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두 쪽으로 나뉜 목제 표찰인 부험符驗 등의 도성 출입허가 증표를 맞추어 문을 여닫았습니다.   

       

# ‘이돌’ 엘레지 

성곽에서는 각자성석刻字成石(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300개 이상 확인되었습니다. 태조대에는 ‘천자문 자호’와 ‘소구간을 표시하는 숫자’, 세종대에는 ‘군·현’의 이름, 조선 후기에는 ‘공사 시기·담당 군영명·공사 책임자와 감독자’등을 남겼답니다. 지금도 엄정하게 시행중인 ‘공사실명제’의 원형을 살피다가 안이토리安二土里의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목멱산 동쪽 기슭 각자에 석수로 등장한 그가 1711년 ≪승정원일기≫에서도 나옵니다. 광희문을 개축할 때 홍예석에 깔려 운명하였기에 쌀과 포목이 지급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세종대에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4곳에 구료소救療所를 설치했지만 공사기간 중 872명이나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돌을 떠서 나르고, 쪼아서 모양을 만들고, 땅을 파고 다지며 도성을 쌓아 올린’ 이름 없는 백성들을 생각했습니다. 1396년에 무사와 번영을 기원하며 백악과 오방신에게 제를 올렸습니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축성제의 현장에서 우리말 ‘이돌(둘째 아들)’의 한자식 표기인 이토리가 마음에 새겨집니다. 

     

# 터와 무늬

흑백 기록사진에는 양옆으로 성벽이 연결된 숭례문이나 코앞으로 전차가 지나가는 흥인지문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확인케 하는 이미지에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합니다. 이후 전개된 도성의 훼손과 멸실이 세월의 풍화 때문만은 아닌 까닭이지요.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설치된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된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도시개발의 명목 아래 도성은 파괴되어 갔습니다. 발굴과 복원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며 2014년 기준으로 전체 18.627km 가운데 약 13.3km가 보전되었습니다. 

근래 도성에 근접하여 형성된 마을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바뀌어갑니다. 달동네가 아닌 성곽마을이란 호칭은 낙후된 주거지에서 소중한 생활문화유산으로의 인식 변화를 반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유적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생활의 터전으로 기억될 도성의 현재가 다채로워진다 싶습니다.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한양도성은 능선을 따라 쌓은 ‘보이는’ 성곽을 말하지만, 넓게는 ‘성안’과 함께 성저십리城底十里(성 밖으로 대략 10리)를 포함한 한양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성 안과 밖의 삶을 구분 짓는 ‘보이지 않지만 보일 듯한’ 경계로도 작동했습니다.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한 박완서의 소설 「엄마의 말뚝」을 예로 삼습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난 주인공의 엄마는 문밖(성 밖)에서 문안(성안)으로 이사를 하며 바라 마지않던 ‘말뚝’을 박게 됩니다. ‘문안’에 대한 열등감과 함께 ‘문밖’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만함을 지닌 인물이 막상 ‘안’에서는 ‘밖’을 그리워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행정구역상 같은 서울이지만 도성이 가르는 안과 밖의 구별을 한 시절의 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요.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유형, 무형의 차이가 선명했던 시간들, 까다롭고 자기 이익만 밝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지방 사람들이 서울 토박이를 부르던 용어가 따로 있던 한때 말입니다. 말이 품은 편견과 선입견은 덜어내며 '서울깍쟁이', ‘서울내기’를 써봅니다. 

근현대시기 한양도성의 모습을 살펴보다 ‘인 서울’이라는 다국적(?) 용어에 생각의 갈래가 닿았습니다. ‘인 서울’의 시작점이 ‘성안(문안)’과 ‘성 밖(문밖)’의 나누기였나 싶은 뜬금없는 의문은 어쭙잖은 염려로도 이어집니다. 대학입시에서 당락을 결정짓는 커트라인의 의미를 넘어 심화되는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위계를 방증하여 간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순성을 마치고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 역사와 함께한 하루를 정리해봅니다. 600년 넘게 한양에서 경성 그리고 인구 천만의 거대도시 서울로 급격한 변화를 견디어 온 한양도성. 몇 해 전부터 인류에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임을 전 세계에 알려오고 있습니다. 세계성곽문화유산들과 함께 대륙을 넘나들고 수 천 년의 시간대를 오르내리는 역사여행의 한 거점으로 자리 잡겠지요. 깊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한양도성의 신화는 새롭게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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