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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16. 2022

8. 우리 옛것과의 만남

<노걸대>에 대하여

쏼라쏼라와 후구리뚜구리     

몇 해 전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노걸대老乞大’, 낯선 이름이 궁금증을 불러온 전시물은 옛 책이었습니다. ‘노’는 애칭이나 경칭에 붙이는 말이고 ‘걸대’는 북중국의 몽골계 민족인 거란인을 가리키는 말(Kitai 또는 Kitat)의 음차입니다. 원元대 이후 중국 및 중국인의 대명사가 된 ‘키타이’에서 현재 중국을 부르는 말 가운데 하나인 ‘캐테이(Cathay)’가 유래합니다. ‘중국인을 일컫는 애칭’이나 ‘중국 사정에 훤한 중국통’이란 뜻의 노걸대, 중국어 교재의 제목으로 맞춤이다 싶었습니다. 


두 해 가까이 코로나로 교육프로그램이 일시정지였던 국립중앙박물관회에서〈노걸대〉와 반갑게 재회했습니다. 해외 출입이 어려워진 시기, 단기특강 ‘우리 옛 선조들의 세계기행’에 다소나마 숨이 트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이웃한 나라의 언어를 아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중국어, 몽골어, 여진어(만주어), 일본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노걸대〉는 통역관을 양성하는 사역원에서 중국어 학습의 기본 교재입니다. 최초 14세기에 만들어졌으리라 하나 전하지 않고, 현전하는 16세기 초 간행된 가장 오래된 한글 번역본의 현대역을 살펴봅니다.      

[중국인] 큰 형님, 당신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고려인] 나는 고려의 서울(개경)에서 왔습니다.

[중국인] 이제 어디로 갑니까?

[고려인] 나는 북경을 향하여 갑니다.

...

[고려인] 당신이 이미 북경 향하여 가신다면 나는 고려 사람이라 중국 땅에는 익숙하게 다니지 못하니 당신이 모름지기 나와 동행하여 가 주십시오.

[중국인] 그렇다면 우리 함께 갑시다.     

시대적 배경인 고려를 지우면 지금, 여기에서 벌어졌음직한 만남으로 〈노걸대〉는 시작됩니다. 존경의 뜻을 담은 호칭 ‘큰 형님’ 이 주체여도 우리말 존칭 어미가 붙지 않은 것은 우리와 경어법이 다른 중국어의 문법을 따라서입니다. 여러 차례 같은 제목으로 간행된 언해본은 두 언어의 변천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헌자료입니다. 

역관을 가리키는 '통사'를 넣어 '박씨 성을 가진 역관'이라는 뜻인 〈박통사朴通事〉란 고급단계의 교재와, 조선 정종 때 문신으로 귀화인인 설장수偰長壽가 지은 〈직해소학直解小學〉도 한어 학습에 쓰였답니다.

사신이나 역관 등 대외 교류에 종사한 이들이 아니라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흔치 않은 시절, 〈노걸대〉의 주인공들은 상인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대화체로 펼쳐집니다.  

     


중국어를 어떻게 익혔는지를 묻는 중국인에게 고려인은 부모의 뜻에 따라서 한인漢人도 있는 학당에서 한인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학생 이름을 적은 대나무 막대기를 제비뽑기 통에 담고 하나씩 뽑아 글을 외우도록 하여 외우면 면첩을 받고, 아니면 세 번 맞았다고 전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원어민 회화, 암기와 암송의 학습법은 그대로입니다. 문득 외국어 공부가 곤혹스러웠던 학창 시절을 떠올립니다. 단어를 외우며 깜지를 쓰느라 연필심으로 거뭇해진 손날을 지우개로 지울 때 한 친구가 성경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짓다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10대들의 외국어 학습의 고충은 바벨탑을 짓던 이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우리말이 ‘온 땅의 하나뿐인 언어’ 여야 한다는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소망 사이를 오갔습니다.      

〈노걸대〉는 무려 106개의 상황에 중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다시 고려에 팔 물건을 사서 귀국길에 오르는 여정을 담습니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듯 구체적인 설정 중에서 고려에서 온 친척과의 만남 편을 봅니다.     

[이씨] 이 편지에 쓴 것이 아무런 자세한 것이 없어요. 아저씨가 떠날 때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누나, 매형, 둘째 형님, 셋째 형님, 형수님, 그리고 여동생과 남동생들은 모두 잘 있었습니까? 

[고려인] 다 잘 있었네.

[이씨] 그렇게 잘 있으면 ‘황금이 귀하다고 말하지 마라, 편안함이 가치가 크구나.’라는 셈이지요. 어쩐지 오늘 아침 까치가 반갑게 울고 또 재채기도 하더니 과연 아저씨가 찾아오시고 편지까지 왔어요. 말하지 않습니까?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보다 비싸다’라고. 저희 집사람과 애들도 잘 있습니까? 

[고려인] 다 평안하게 있었네, 자네 어린 딸이 발진이 생겼더니 내가 떠날 때에는 다 좋아져서 아물었다네.     

집 소식이 소중하다는 글은 당 두보의 시 ‘춘망春望’의 유명한 시구라 합니다. 대화 사이에 적절히 인용된 시구나 격언과 대가족의 안부를 묻는 길고 긴 인사가 인상적입니다. 홍역을 앓아 열꽃이 피었을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남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 코가 간질간질해진다는 속신에 웃음 짓게 됩니다.      

14세기 중국 원대의 생활상, 풍속, 상품의 매매과정 등을 보여주는 〈노걸대〉는 한 편의 로드무비 같습니다.

북경 못 미쳐 와점에 투숙했을 때 여관 주인이 말 사료 값을 비싸게 받아 중국 상인과 시비가 벌어지고, 민가에 머물게 되었을 때는 신원을 의심받고 헛간을 잠자리로 받게 된 이야기. 이와는 다르게 쌀을 구하는데 지어 놓은 밥을 선뜻 내준 후한 인심의 집주인 이야기. 인생의 설탕과 소금 같은 일로 웃고 우는데 시대와 지역의 구별이 없습니다.

당시 고려의 주 수출품인 말, 인삼, 모시, 삼베 등을 다루는 교역은 약 1년을 주기로 했습니다. 북경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데 9~10개월, 고려에 와서 물건을 팔고 사는데 2~3개월이 걸린답니다. 고려 상인은 보통 산동에서 깁과 능, 무늬 있는 비단과 솜을 구입하여 아청이나 분홍으로 염색하여 고려에서 파는데 중개료와 세금을 제하고 5할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대도시 북경을 방문한 고려인의 소감은 어떠했을까요? 귀국 후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느라 밤낮을 잊었을 듯싶습니다. 상점에 가득한 비단만 봐도 황홀경에 빠져들게 화려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 초록색의 벽돌에 구름무늬를 놓은 비단, 연초록빛의 보상화를 무늬로 한 비단, 검은 초록빛의 천화의 팔보를 상감한 비단, 초록빛의 벌이 매화에 걸려 있는 무늬의 비단... 도홍빛의 어깨걸이에 구름무늬를 한 비단, 짙은 붉은색에 금실을 드려서 짠 비단, 은홍빛에 작은 연꽃을 무늬로 한 비단, 살코기 빛깔의 넝쿨 모란꽃을 무늬로 한 비단...’ 

“비단이 장수 왕서방...... 띵호와 띵호와......” 어릴 적 들었던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문양과 색채의 향연이었을 비단가게를 상상해봅니다.


우리는 중국말이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시끄럽다고 합니다. 원래는 “됐어”, “충분해”라는 뜻을 지닌 중국말 “쏼라쏼라”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함부로 말할 때 휘뚜루마뚜루 써버립니다. 한편 우리말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한국인은 “후구리뚜구리” 떠든다고 느낀답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말은 그저 소음일 뿐입니다.

중국어를 익힌 고려인에게 쏼라쏼라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감정을 담은 말로 해석되었을 것입니다. 고려인과 동행한 중국인은 의미는 알지 못해도 우리말을 후구리뚜구리로 듣지 않았으리라 싶습니다. 

〈노걸대〉의 마지막은 훗날을 기약하는 고려인의 인사말입니다. 때로는 수많은 말을 침묵이 대신합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중국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고려인] 형님, 우리는 돌아갑니다. 형님, 잘 있으시오. 우리가 당신에게 많이 폐를 끼쳤습니다. 당신은 부디 허물하지 마시오...산山도 서로 만날 날이 있으니 이로부터 다음에 다시 서로 보면 좋은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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