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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Aug 21. 2023

25. 우리 옛것과의 만남

                                   <책거리>

                                                     믹스 앤 매치 Mix & Match     

우리의 문화유산이 디지털 기술과 만났습니다. 전시실 벽면이 빛의 그림판입니다. 대형 영상에 화려한 문양의 책갑(포갑)으로 감싼 책 더미, 어깨에 숄을 둘러 화사하게 치장한 화병들(포복식 도자기), 극소수 얼리어답터가 전유했을 자명종과 회중시계 등이 나무 선반 가득입니다. 물 건너온 당시의 사치품들이 ‘색色을 입었다, 벗었다’ 점멸합니다.

그뿐인가요, 태블릿 PC를 이용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의 이미지로 ‘책장을 채울 수’ 있습니다. 과거를 눈앞으로 소환해 현재와 이어주는 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실감 영상 〈꿈을 담은 서재, 책가도〉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플렉스 Flex in 조선궁중 책가도     

책가란 ‘서가’ 또는 ‘서재’란 뜻으로, 책가도는 서재가 있는 그림입니다. 책장 선반에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책과 여러 기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조선 판 정물화입니다. 

책가도는 18세기 후반 처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지독한 애서가이자 독서광이었던 정조와 관계가 깊습니다.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장자는 말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책가도의 쓰임이 본래 궁실 장식임을 밝혀줍니다. 

김홍도, 장한종 등 당대 내로라하는 궁중 화원들이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궁중책가도는 규모가 큰 10폭의 연폭 병풍으로, 한 폭만 떼어 걸어도 손색없을 만큼 각 폭은 독립적인 완성도를 갖췄습니다. 기본적으로 좌우동형 구도에 책 쌓임과 기물 놓임이 다채롭고, 공간의 채움과 비움은 조화롭고 안정적입니다. 

원색의 향연에 투시도법과 명암법이 정확하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숨을 삼킬 만큼 강렬했던 궁중책가도의 첫 느낌은 우리 것이 아닌 서양화라는 섣부른 판단과 함께였습니다. 

     

18세기 조선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했습니다. 북학이 대두하고 외교사절의 교류와 상업적 거래가 활발해져 다양한 상품이 조선에 수입되었습니다. 책가도에 서화 골동 취미와 서양적인 시대감각이 가미된 이유입니다.     

우리의 책가도는 중국의 ‘다보각경’에서 유래합니다. 청대 황실에서 완상물을 보관하는 작은 진열장(장식장)을 ‘다보격’이라 했는데, 밖으로 나설 때 소중한 물건을 넣었던 작은 상자에서 연유한답니다. 다보각이란 ‘많은 보물들의 시렁’이라는 의미로, 기물을 놓는 일종의 선반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일종의 보관, 전시 형태는 16~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갤러리나 뮤지엄의 시원적 형태로 독일의 ‘쿤스트캄머(예술의 방)’와 ‘분더캄머(호기심의 방)’나 영어로 ‘Cabinet of Curiosity’가 이를 가리킵니다.      

책가도에는 선반이 휘어질 듯 오로지 책만 그득그득한 그림도 있습니다. 선비가 대접받는 사회에서 출세를 담보했던 서책이 학창 시절의 공부 압박감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일월오봉도 대신 정조를 ‘호위한’ 병풍도 그러했을지 모릅니다. 그저 흐뭇하였을 정조와는 달리 시험이 코앞인 학생처럼 긴장하게 됩니다.      

책만 빽빽한 책가도는 중간중간 ‘꼬리를 살랑거리는’, 책갑에서 책을 손쉽게 빼내는 용도의 끈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자로 그은 듯 반듯한 직선들의 조합으로 표현됩니다. 책의 단면에는 가늘고 예리한 가로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종이가 유리판, 금속판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손가락을 베이는 것 아닌가 하면서, 수평과 수직의 선과 책갑의 격자구조가 만들어내는 ‘차갑도록 단호한’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빠져듭니다. 

도 1, 도 2 

   

                                                   만물상萬物相 in 조선책거리     

책가도와 함께 많이 쓰이는 말이 책거리입니다. 책가도의 영어식 표기 ‘Books & Things’에서 ‘things’에 해당하는 ‘거리’는 순수한 우리말로 일거리, 구경거리, 이야깃거리처럼 복수형의 의미로, 한자 ‘巨里’는 이두식 표기일 뿐입니다.      

구별하자면 서가에 책과 물건들이 배열된 것이 ‘책가도’고, 서가가 없는 경우 책과 기물의 배치 방법에 따라서 나열식, 탁자식, 밀집식 책거리로 나눕니다. 또는 궁중책가도는 눈속임(트롱프뢰유) 유형으로, 책거리는 독립 유형이나 탁상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세분화는 책가도의 폭넓은 인기를 방증합니다. 궁궐을 벗어난 책가도는 민간으로 퍼졌습니다. 바탕은 종이가 비단을 대신하고, 폭 수는 줄고, 병풍의 크기는 궁중화의 1/2~1/4로 작아집니다. 기물의 가짓수나 크기를 줄이지 않고, 본래의 존재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묘책이 등장합니다. 책장을 치우고 기물을 일렬로 세우거나, 탁자나 서안에 테트리스처럼 기물을 쌓아 올립니다. 이도 여의치 않으면 기물을 덩어리지게 뭉쳐 버립니다. 

반닫이 위에는 이불, 요, 베개를 얹고, 선반에는 세간과 잡동사니를 보자기로 싸서 올려놓았던 오래전 우리네 살림살이와 닮아 있습니다.

      

책거리에는 중국 물건을 선호한 사대부들과는 다른 백성들의 삶과 취향이 적극 투영됩니다. 단색유의 채색도자기나 표면에 빙렬이 가득한 백자병 같은 수입품 대신에 청화백자가, 표지가 튼튼해 책갑이 필요 없는 조선의 서책이 놓입니다. 왕성한 생명력과 충만한 영기를 발산하는 정물로 수박, 석류, 포도, 가지 등 과 용, 기린 같은 상상의 동물들이 그려집니다. 

상상력에 날개가 더해진 민화책거리는 때때로 초현실주의까지 다다릅니다. 사물들은 무중력 상태인 듯 떠다니다 시렁을 통과하고, 심지어 연못까지 시렁에 올려집니다. 사물의 객관적 크기는 제쳐놓고 기물보다 작게 인물을 그려냅니다. 한 화면에 시점이 여럿이고, 동시에 역원근법까지 표현되어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책거리만큼 물건이 많은 경우는 없습니다. 민화책거리는 가히 다다익선의 실사판입니다. 길상적 요소가 다분한 책거리는 더 이상 문방 청완의 장식용 회화가 아닙니다. 행복, 다산, 출세를 소망하는 우리네 삶의 자화상입니다.      

출발점은 개인의 수집욕구, 재력가의 호사취미가 낳은 ‘유럽 발 컬렉션’이지만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는 세계의 정물화 가운데 유일하게 책을 특화하며 안착한 우리의 책거리. 책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 추상성을 포용해 내고, 소재와 구성에서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은 파격의 연속입니다.      

민화 책거리에 감동한 야나기 무네요시는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다... 무명의 조선 민화를 보게 될 것이다... 민화에는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불가사의’란 이질적인 두 단어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수식으로 느껴집니다.      

꿈과 기술, 어제와 오늘을 ‘섞어 빚은’ 영상 앞에서 책가도의 내일을 그려봅니다. 무엇이 섞이고 또 섞여 경이롭게 새로울 아름다움을 만들지 궁금합니다. 

도 1.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 책가도

도 2. <책거리도>, 국립민속박물관- 책만 있는 책가도

<책가도>, 국립민속박물관-나열식 책거리

<책가도>, 서울역사박물관-탁자식 책거리

<책가도>, 국립민속박물관-밀집식 책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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