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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Feb 14. 2022

1. 우리 옛것과의 만남

   <문자도>에 대하여

그림 가라사대  

   

늙은 어버이를 업고 있는 자식의 모습, 단박에 알아차리셨지요? 

예, 한자 효孝, 효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옛 중국의 이름난 효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한겨울이라 어머니가 먹고 싶다 하신 죽순을 구할 수 없었던 오나라 맹종이 대숲에 앉아 엉엉 울었더니 언 땅에서 죽순이 솟아났답니다. 어머니가 겨울에 잉어를 찾으시자 맨몸으로 꽁꽁 언 강을 녹이려 했던 진나라 왕상에게는 잉어 두 마리가 절로 툭 튀어나왔다지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한나라 황향은 여름이면 베개에 부채질을 하고, 겨울이면 제 몸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하며 아버지를 모셨다고 합니다. 성군으로 이름난 순임금은 임금 되기 전 계모의 학대에도 내색 없이 순종하며 거문고를 탔다지요. 고대 인물인 육적은 어느 잔치에서 귀하디 귀한 귤을 보고 집에 계신 어머니 생각에 차마 먹지 못하고 몰래 품에 숨겼다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니 ‘믿거나 말거나’에서 전자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러면서 땅덩어리가 크디큰 중국이 효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느낍니다. 우리에게는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나 죽은 아비를 살려낸 바리공주가 있으니까요. 여하튼 새삼스레 옛이야기에 마음이 움찔움찔합니다. 적지 않게 나이가 든 지금도 팔순을 훌쩍 넘기신 부모님께 여전히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식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옛 그림 앞에 섭니다. 죽순, 잉어, 부채, 거문고 그리고 귤 중에서 두어 가지가 한자 위에 무심히 포개져 있습니다. 중국 효자들 이야기를 모른다면 수수께끼 같은 그림, 문자도文字圖입니다. 


글씨일까, 그림일까 싶은 문자도, 그 뿌리는 중국입니다. 우리에게 처음 전해진 중국의 문자도는 백수도로 큰 壽 안에 수백 개의 작은 壽가 가득 쓰여 있었답니다. 壽 문자도에는 획 속에 오래 산 유명한 신선들을 촘촘히 그려 넣은 형태도 있습니다. 연초면 주고받았던 세화 중 하나로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덕담을 전했습니다. 

행복(福), 출세(祿), 장수(壽)를 소망하는 길상문자도가 한자문화권인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 주류였는데 유독 우리에게는 유교문자도가 백수백복도의 유행을 앞섰다고 합니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무려 여덟 글자입니다. 효·제·충·신은 『논어』에서, 예·의·염·치는 『관자管子』에서 왔습니다. 효제문자도 혹은 효제도라 불리는 유교문자도의 이른 시기에는 수壽자 그림처럼 큰 글자 안에 관련된 고사나 설화가 빼곡하게 그려졌습니다. 차츰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한자의 획을 차지하며 그림 같은 글자, 글자 같은 그림이 되었습니다.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제悌 글자에는 꽃과 새가 등장해 화조도 같습니다. 옥매화나 산앵두나무의 꽃과 잎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제애를 상징합니다. 할미새 두 마리가 정답게 벌레나 꽃잎을 나누어 먹으며 우애를 드러냅니다. 시끄럽게 우는 모습은 다투는 것이 아니라 다급할 때 서로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것입니다.

충忠 글자에는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를 배경으로 잉어나 새우가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 있습니다. 용문을 차고 올라서 용이 된 잉어처럼 과거에 급제하고 임금에게 충신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새우鰕와 조개蛤는 발음이 화합和合과 비슷해 군신 간의 화합을 뜻합니다.

신信 글자에는 서왕모西王母가 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파랑새(靑鳥)나 인면조와 진나라 궁궐의 동산, 상림桑林에서 편지를 물고 온 흰기러기(白雁)를 그렸습니다. 믿음은 서로 약속하고 뜻을 전하는 가운데 싹트기 때문입니다.

예禮 글자에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의 살구꽃이 피어 있습니다. 중국 최초의 문자인 낙서洛書를 거북이가 등에 지고 나와서 세상에 예가 갖춰졌다는 의미로 거북도 그려집니다.

의義 글자의 복숭아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을 뜻하며, 물수리 두 마리는 부부간의 정다운 인연을 노래합니다.

염廉 글자에서는 봉황의 고고한 자태가 눈에 띕니다. 수천만 리를 날고 배가 고파도 인간이 먹는 조를 쪼아 먹지 않고, 오동나무 그늘에서만 잠을 잔다는 상서로운 새는 청렴함의 상징입니다. 염치를 아는 군자는 들어서고 물러날 때를 안다는 의미에서 뒷걸음질 치는 게도 그려집니다. 

치恥 글자에는 백이, 숙제의 절개를 상징하는 수양산의 매화와 달, 충절비와 누각이 있습니다.


문자도에서는 우화 속 장면들을 펼쳐 놓은 듯 동식물이 글자 조형물에 올라타고 뛰어놀고 있습니다. 각 문자의 짝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격은 아닌지, 맞춤이다 싶은 상징들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딴지를 걸어보면서 어느새 여덟 덕목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효제도는 조선시대 백성들을 교화시키려는 도덕 교과서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히 변치 않을 소망을 다독이는 마음의 부적이었습니다. 福 문자도가 행복을 가져오듯, 孝 문자도는 효자를 만든다는 믿음이 담겨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유교문자도는 국제적인 예술입니다. 그림과 글씨의 결합이라는 유사점으로 비주류를 대변하는 거리 미술, 서구 그라피티(graffiti art)의 조형미와 비견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기원과 시대적 배경은 차이가 큽니다. 민화 문자도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양반문화에 대한 동경과 서민 사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등장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문양이나 색감이 현대적인 우리의 민화 문자도, 자유로운 상상력도 매력으로 손꼽힙니다. 책거리 기물이 상하로 배치된 책거리문자도, 소상팔경도나 관동팔경도가 아래 위로 배치된 산수문자도 등 본래 한자 의미와 상관없는 다양한 화제와도 신나게 어우러집니다. 성난 물결과 토산물이 그려져 바다 내음이 물씬한 제주 문자도처럼 지역적 개성도 뚜렷합니다.

모필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법 이외에도 가죽 붓을 재빨리 구사하는 혁필화나 인두로 종이를 지져가며 그리는 낙화 기법도 쓰입니다. 비상하는 새의 날개 짓 같은 율동감이 넘치고, 고가구의 나뭇결 같은 촉감적인 그림이 새로운 미감을 경험케 합니다. 근래에는 한글을 이용한 문자도가 활발히 제작된다고 합니다.     


다시 孝 문자도를 바라봅니다. 철딱서니 없는 마음은 제철이 따로 없는 먹거리가 문 앞까지 배송 가능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먼저 느낍니다. 그렇지만 바로 묻게 되네요. 신선함과 신속함이 묵직한 효의 무게를 얼마나 덜어주고 있을까요.  

현대판 문자도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라진 세태에 발맞춰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를 뜻하면서요. 자식이 어버이에게 품은 마음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기적 같은 기술이 서둘러 나와야 할 텐데 싶습니다.

문자도 병풍. 국립 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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