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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나 Oct 01. 2023

27. 우리 옛것과의 만남

                    안동 답사에서

 안동 가는 길     

작년 가을, 아주 오랜만에 답사에 나섰습니다. 지나간 세월들이 켜켜이 쌓인 곳, 안동. 이곳저곳을 보고 또 보며, 옛사람들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퇴계를 만나다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의 자취는 450여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깁니다. 

옛적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자성록』1558).” 한 획을 내리고 한 글자를 이룰 때마다, 몸이 글자를 따라줄 것인지 속으로 묻고 또 물었을 선생의 편지는 삼천 편이 넘는다고 합니다.     

네가 산사에서 별 탈 없이 공부하고 있다 하니 매우 기쁘다... 네 아내가 지어 보낸 단령을 받으니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만 어려운 살림에 구태여 이렇게까지 하니 오히려 편치 않구나... 하얀 접는 부채 두 자루와 둥근 부채 두 자루, 참빗 다섯 개, 먹 한 개, 붓 한 자루를 보낸다. 접는 부채와 참빗은 너의 처에게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선생이 첫째 아들 이준(1523~1584)에게 보낸 글을 펼칩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사대부는 ‘과거시험 수험생’ 아들과 한 땀 한 땀 시아버지의 ‘근무복’을 지었을 며느리에게 애틋한 마음을 전합니다.      

장손 이안도(1541~1584)가 혼인할 때는 ‘상경여빈相敬如賓’를 말합니다.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예의와 존경심을 잊어버리고 버릇없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 버린다. 

‘손님 대하듯 공경해라’, 선생이 강조한 부부의 도리입니다     

『대학』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잘못이 없는 다음에라야 남을 나무란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일찍이 경험한 바를 말해보겠습니다. 내가 두 번 장가들었는데, 한 번은 매우 불행한 경우를 만났지요. 그러나 이러한 처지에서도 마음을 야박하게 먹지 않고 잘 지내보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이 괴롭고 생각이 산란하여 그 번민을 견디기 어려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대는 반복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뉘우쳐 허물을 고쳐야 합니다. 종전의 태도를 끝내 고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학문을 하고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전라도  순천  출신으로 퇴계  말년의  제자인 이함형(1550~1577)이 집에 간다 하니 69세 스승이 붓을 듭니다. 겉봉에 '노차물개간'(길에서 뜯어보지  말고 집에 가서 뜯어보라)이라 적힌, 20살 제자에게 준 편지는 부부관계가 잘못되는 데는 아내보다 남편의 책임이 크며, 정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가 파경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전합니다.

두 아내와 사별한 선생의 말씀이 세찬 바람처럼 준엄하다 싶은데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따사로운 햇살이었는지 나이차 많은 어린 제자는 이후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의 글을 생각하며 도산서당, 퇴계의 태실이 있는 노송정 종택 등을 찾으면 나지막하고 따뜻한 음성이 들릴 듯합니다.      


원이 엄마를 만나다     

자내 샹해 날드려 닐오되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날하고 자식하며 뉘긔 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는고...

정갈하게 써 내려간 옛 한글에 담긴 절절함이 400여 년을 훌쩍 넘습니다. 이는 1998년 안동에서 택지조성을 위해 분묘이장을 하던 중 한 고성 이 씨 남자의 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31살에 세상을 등진 남편 이응태(1555~1586)에게 아내가 보내는 답장 없는 편지로 밝혀집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희어질 때까지’ 살자는 약속을 저버린 남편에게 꿈에 와서 모습을 보여 주기를 부탁한 글이 안동, 두 글자와 나란히 마음에 새겨집니다. 

이응태가 부친과 주고받은 편지는 당시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음을 알려주고, ‘자내(자네)’는 상대를 높이거나 동등하게 대하는 말로, 이 두 가지는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조선중기 시대상을 방증한답니다. 

이응태가 나고 자란 귀래정歸來亭, 무덤 부장품이 전시된 안동대학교 박물관과 편지글을 소재로 한 테마공원에서 남편의 쾌유를 바라며 본인의 머리카락을 섞어가며 미투리를 삼았던 여인을 생각합니다. 

성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원이엄마’로 기억되는 그녀, 이리저리 돌려가며 빼곡히 적어 내려간 편지글에 미처 쓰지 못한 말은 무엇일까요? 훗날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지는데 아비를 잃은 원이, 유복자와 함께 한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덴동어미를 만나다     

내방가사, 조선 시대 주로 양반가의 부녀자들이 지은 문학의 한 형태로 영남대가 내방가사嶺南大家內房歌辭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내방가사 전승과 보존을 위한 대표적인 단체로는 '안동내방가사전승보존회'가 있으며 현재 두루마리에 한글 궁서체로 쓴 6천여 필의 작품들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여성의 놀이문화를 보여주는 <화전가花煎歌>를 봅니다. 

봄날 경치 좋은 곳에 모인 여성들은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장기자랑도 하고, 이를 가사로 썼습니다. 4·4조가 기조로, 글에는 ‘이야∼더라’·‘어화∼더라’, ‘두어라’·‘긋처라’·‘어화’를 넣고 ‘일장춘몽’·‘남가일몽’ 등을 붙인 후, 끝에는 연대 및 간지干支, 지은이의 택호宅號, 가사를 짓게 된 연유, 아랫사람들에게 주는 충고와 경계의 격언을 쓴다고 합니다.     

가세가세 화전가세 꽃지기전 화전가세

이때가 어느땐가 때마침 삼월이라

봄의신이 은택펴니 따뜻하여 때가 맞고

꽃바람이 화공되어 만화방창 단청같네

이런때를 잃지말고 화전놀이 하여보세...     

본래 「화전가」이나 주인공을 밝혀 「덴동어미화전가」라고 부르는 이 가사에서 ‘덴동어미’는 ‘불에 덴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 번 결혼하였지만 남편 모두 세상을 떠나고 다친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된 덴동어미. 그녀는 세상사가 귀찮기만 하고 살 뜻이 없었지만 이웃의 위로에 힘을 얻고 4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노년의 덴동어미는 화전놀이에 엿 한 고리이고 가서 신명 나게 노는데, 한 청춘과부가 신세를 슬퍼하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삶과 죽음, 가난 등은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고 행복하기만 하거나 불행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고 주변 여성들에게 전합니다. 가사는 참석한 여성의 이름 하나하나를 말하며 모두가 저마다의 봄을 간직한 귀한 존재들이라 적습니다.

흩날리는 꽃비를 맞는 여성들이 울음과 웃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봄나들이에 하루해는 짧기만 했을 겁니다.     

만남과 이별

안동을 찾으며 퇴계 선생, 원이엄마, 덴동어미의 글을 그러모아 보았습니다. 

성별, 나이, 신분, 처지가 천양지차인 세 인물이지만 글이 품은 인생사 편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네 마음을 울리는 것은 다르지 않다 싶습니다. 

각양각색으로 물든 단풍이 그들이 겪은 희로애락의 변주처럼 느껴졌습니다. 안동을 떠나는 발길에 길어지는 가을날의 그림자가 동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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