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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05. 2022

느림보

누구보다 빠르게.

남동생 결혼차 언니가 6일 동안 한국에 있다 출국했다. 언니는 미국에 산다. 나도 언니도 각자 일에 치여 미국에 다시 들어가고 나서야 못다 한 이야기를 영통으로 두런두런 나눴다. 언니는 이십 대에 예쁜 딸들을 낳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 준비 중이다. 자식들을 건강하고 영리하게 키워놓은 언니를 보면 대단하다. 아이 여부는 여전히 나에게 큰 숙제인데 빨리 결혼해서 여성의 중대한 과업을 끝낸 언니가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 어려서부터 언니는 뭐든 빨랐고 나는 뭐든 느렸다.


몇 년 전 아동미술학원을 개원했을 때도 도매 문구점에 가면 항상 두 시간씩 있다 나와 문구점 점원 아줌마가 의아한 얼굴로 내 상태가 괜찮은지 종종 체크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수업 준비를 어떻게 할지 구상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언젠가 3시간 가까이 있는 날엔  ‘나 미친 건가’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반년 정도 지나고 나서야 구매시간을 10분에서 20분으로 줄일 수 있었다. 어느 복도에 어느 칸에 물건이 얼마 하는지 다 꽤버리니 시간이 자연스레 줄게 됐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A부터 Z까지 꾀고 있어야 내가 이 분야를 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원리를 꾀고 난 다음에야 ‘내가 이 일을 할 줄 알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내 메커니즘을 모르는 어린 시절엔 늘 굼뜨고 결과를 못 내는 나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겼다.


어렸을 적 이런 느림보를 기다려 준 어른이 있었으니 고모부였다. 기억 속 고모부는 나를 귀여워해 준 어른들 중 한 명 정도였는데,  언니 기억 속 고모부는 나를 엄청 애지중지 예뻐했다는 거다. 고모부는 올 때마다 언니랑 나에게 두 팔로 안고 들을 정도로 큰 선물을 사줬다. 그날도 고모부와 장난감 가게에 갔고 언니는 빨리 하나를 골라 버렸다. 나는 계속 주저주저하며 돌아다녔다.


별로 갖고 싶은 게 없어 집에 가려는데 고모부가 그래도 “계속 골라봐”하며 기다려줬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장난감을 들었다 놨다 하면 고모부의 크고 하얀 얼굴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려고 눈앞에 왔다 갔다 둥둥 떠다녔다. 언니는 덩치가 산만한 고모부가 그렇게 오랜 시간 나를 따라다니는 바람에 지루한 시간을 계속 견뎌야 했다고 기억한다. 평소 성격 급한 부모님과 쇼핑을 나오면 아무것도 못 고르고 집에 오곤 했는데 고모부는 그렇게 한참을 이것저것 권해주며 나를 따라다녔나 보다.


그러던 와중에 마음에 쏙 드는 장난감을  골랐다. 연보라 조개껍데기 안에 미니인형 두 개와 집안 살림이 정교하게 인테리어 되어있는 장난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갖고 싶다. 아이패드로 그려볼까.


언니와 영통으로 한 대화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너는 그렇게 시간이 한참 걸려 선택한 걸 보면 충격받을 정도로 멋진 거 하나를 찾는다고.  그래서 네가 지난번에 그걸 골랐을 때도 어렸을 때 그 조개껍데기처럼 충격… 어쩌고 저쩌고… 이 언니는 항상 이런 식이다. 언니밖에 못해주는 귀하디 귀한 위로를 해 준다.


이제는 어른들 속도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내가 나를 기다려주고 믿어주어야 된다. 어떤 일을 시작하면 인정하기 괴롭지만 ‘이건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리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내 속도를 알아버리니 조급함보단 여유가 생겨 버리는 게 문제지만.


여태 미술 관련 일을 해오다 삼십 대 중반에 진로를 바꿨다. 유투브에 나처럼 학원 강사였다가 35살에 의대에 입학하거나 이직을 한 유투버를 보면서 많이 용기를 얻는다.


나를 그렇게 예뻐해 준 고모부는 당시 고모와 이혼하고 여태 혼자 사신다고  들었다. 결혼식 때 넌 왜 결혼 안 하냐는 고모 말에 고모는 ‘왜 안 해요’라고 반문했다. 고모부가 있었으면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은 안 했을 텐데 말이다.


폭풍 수다 끝에 언니의 조개껍데기 장난감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더 듣게 됐다. 내 장난감을 보고 충격을 받고 엄마를 졸라 똑같은 걸 사려고 다시 그 장난감 가게에 갔지만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그 얘길 듣고 한참을 웃었다. 저마다 사는 꼴이 귀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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