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행
버스에서 온갖 욕설을 다 듣고 원하지 않는 정류장에 내려 집에 걸어왔다.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하건만 오늘은 우울한 기분을 부추기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다.
대중교통을 타면 나이 드신 아저씨들 때문에 불쾌한 일이 많다. 통로를 지나가거나 줄을 비집고 들어갈 때면 꼭 인기척도 없이 몸을 밀착하며 지나간다.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럴 때면 지나간 아저씨를 저주하는 것밖에 할 게 없다. 며칠 전에는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아저씨가 내 다리와 닿을랑 말랑한 거리에 리듬을 타며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계속 앉아 있을까 하다 그냥 옆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특정 연령대 아저씨들이 곁에 오면 긴장상태가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항상 예의 주시하고 불편한 일이 혹여 생기기 전에 미리 피해있기 때문에 그동안 큰 사달은 안 났다.
홍대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면 꼭 할아버지들이 약주를 하고 버스를 탄다. 그리고 어김없이 몸을 못 가누는 바람에 앞사람을 툭툭 치고 술기운 때문에 숨소리를 거칠게 낸다. 일전엔 주위에 사람이 없어 조용히 자리를 옮겼는데 오늘은 저녁시간이라 버스엔 사람이 빽빽하다. 의자 끝에 걸터앉아 내 머리와 귀를 보호했다.
그런 행동이 기분이 나빴는지 별의별 년 소리를 한 정거장 내내 듣게 됐다. 계속해서 욕을 듣는 와중에. 뒤에서 내 머리를 내려치면 나는 어떻게 하지. 여긴 어디지. 어떻게 할까.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예전에 한 쩍벌남 아저씨가 옆자리 여성의 다리와 닿은 채로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개인 공간을 침범당한 젊은 여성은 불쾌함에 자신의 가방으로 아저씨와 맞닿은 부분을 막았는데 아저씨가 되려 진노하며 여성의 머리를 잡아 흔드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다. 여성은 화를 냈고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는 여성이 어른에게 예의가 없다며 비난했다. 나는 어떻게라는 말만 할 뿐 얼어붙어서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당시에 그 여성 편에 서지 못한 죄책감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 내가 그 상황에 똑같이 놓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겁이 났다. 하지만 날 칠 거라면 벌써 쳤겠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마침 누군가 하차벨을 눌렀고 나는 어딘지도 모른 채 바로 내렸다. 술주정뱅이 할아버지는 갑자기 내가 자리에 일어서자 욕을 멈췄다. 그 정도 깜냥밖에 안 돼는데도 욕을 그렇게 해댄 거다. 그리고 아무도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렇게 길거리만 다녀도 불편한 스킨십들이 어렵지 않게 일어난다. 우연히 이런 주제로 동성끼리 이야기를 했다. 교육기관, 병원, 일터, 길거리에서건 심지어 소개팅에서 일어난 불편한 스킨십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인생인데도 불쾌한 경험들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다들 일상다반사라 어느 순간부터 그저 무시하고 사는 것이다. 계속되는 불편함에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충동성을 조절하고 피해 주지 않고 살면 그만일 텐데. 내가 말해놓고도 이 글 가운데 가장 의미 없게 느껴진다.
미술학원 면접에 통과되고 남자 학원 원장이 저녁 늦게 그림을 보고 싶다고 다짜고짜 혼자 있는 집에 찾아오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격노했고 다음날 일을 못하겠다고 전했다. 지인에게 오히려 왜 혼자 사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냐며 충분히 상대가 오해 살 짓을 한 것이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레서 사람이 싫다. 사실 이런 취급을 받을까 봐 다수의 여성들은 자신이 추행당한 사실을 숨긴다. 지인에게도 이런 손가락질을 당하는 판국이니.
그 원장의 블로그를 미루어 보아 올바른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목소리를 내던 자여서 꽤 충격을 받았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뒤에서 한 남학생이 와락 안아 내 가슴을 만지고 도망갔던 것도 새삼 떠올려졌다. 갖가지 추행에 노출된 채 살아온 평범한 여성으로서 묻어 두었던 나쁜 기억들이 술주정뱅이 한 명 때문에 하나씩 소환돼버렸다.
자애로운 인상을 지녔다고 해서 멀쑥하게 입었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지하철에서 여성의 머리를 흔들었던 쩍벌남 아저씨는 멀끔한 남색 정장에 트렌디한 뿔테를 썼던 지적인 이미지의 남성이었다. 사회 정의를 위해 인권을 외친다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그림에 대해 얘기하자는 빌미로 오픈 마인드를 가지라며 한밤중에 불쑥 찾아올 수 있다.
술 먹은 아저씨들은 주로 노약자석에 타니까 뒷좌석에 타자. 탑골공원을 지나갈 때 얼굴을 들이밀고 말거는 할아버지를 조심해야 한다.
나름의 노하우로 상대의 추행도를 짐작하고 피하는 법을 터득했다 했는데 난 아직도 내공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