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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Feb 07. 2022

나쁜 기억

나쁜 기억은 변기 속으로.

지금은 새벽 2시가 조금 넘었다 원룸 치고 방음은 잘 되는데 지금 문제는 변기다. 옆집이 물을 내리면 내 변기도 큰 굉음을 내며 물이 내려진다.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아 동영상을 켰지만 바로 소리가 사라졌다. 동영상을 찍는 건 포기하고 배수구 관련 유튜브를 네 편정도 봤다. 옆집도 이런 상황을 눈치챈 건지 저 너머에서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화장실 안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쯤 되면 방음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살던 곳엔 통화내용까지 들렸으니 지금은 양호하다.


아무튼 내 변기에 이물질이 많이 낀 거라고 안경 쓴 기사님이 유튜브에서 말해 주셨다. 이사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집 안 여기저기 손 볼 곳들이 하나 둘 날 반겨준다. “오 언니 여기 스티커 붙여져서 떼야 돼, 근데 잘 안 떼질 거니까 각오해. 여기는 세탁기를 이년 동안 닦지 않아서 솔로 문질러야 돼, 에어컨 청소도 부탁해!” 이렇게 브런치에 털고 나니 짜증이 좀 해소된다.  엄마가 마침 뚫어뻥 용액을 짐짝에 실어 주셨다. 오 내 구세주.


요새 전화할 때마다 내가 보고 싶은지 엄마는 집에 좀 오라며 살짝 울먹인다. 이젠 정말 분가를 한 것만 같은지 가슴이 좀 먹먹하신가 보다.


아무튼 변기에 용액을 붓고 30분을 기다려야 하는 차에 브런치를 쓰기로 했다.

요즘은 에세이집을 읽고 있다. 책덕 출판사에서 번역된 애나 아카나 저의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 에세이집이다. 애나는 사업도 하고 유투버도 하는 만능 엔터테인먼트다. 그리고 전에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했다.


세상 모든 일에 당차 보이는 애나는 10년 전만해도 자살한 동생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매일같이 약물에 의존했다. 그날도 역시 약에 취해 티브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코미디 센트럴> 특집이 방영하고 있었고 애나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잊고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당시 13살이었던 여동생은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에 대응하기 위해 비비탄을 학교에 가져갔다가 학교에 퇴학을 당하고 전학을 갔다. 이때만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아직 자녀의 정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여동생의 행동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애나는 말한다. 그리고 활달하고 사교적이던 애나의 동생 크리스티나는 전학을 가고 급격히 말수가 적어졌다.


나도 고3 때 한 친구와 오해가 깊어져 입시 미술학원에서 그 친구 무리에 의해 1년 동안 은따를 당했는데 엄마와 학원 선생님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린애들 다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는데, 당시에 학원의 몇몇 아이들이 사건이 심각하다는 걸 공감해줬고, 나에게 다가와 위로해주고 놀아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학원을 옮겼여야 했다. 왜냐면 그 뒤로 3년 동안 그 학원 무리의 비아냥이라든가 조소가 내 감각에 박힌 건지 학원 주변을 지나가기라도 할 때면 그 무리랑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잠깐씩 누군가에게 기도를 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의식은 사라졌지만 예전 학원 길을 지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좋지만은 않다. 왜 그 친구와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 지금은 알 수 있다. 어떻게 오해와 갈등을 푸는지 몰랐던 철부지 고등학생들이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외부에서 몇몇 사건들이 연이어 생기는 바람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한동안 내가 왜 고통받아야 했는가 이유를 되묻다 보니 애석하게도 좋은 추억들 보다 선명해지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친구한테 먼저 상처를 줬을 수 도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뭔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 나도 그렇게 좋은 친구는 아니었을 수 있었겠구나. 그 친구도 그런 상황까지는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그렇게 고3이 끝날 무렵,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미술치료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누구인가 알고 싶었다. 내 작은 습관들이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낼 수 도 있다면 인지하고 싶었고 아직 판단력이 서지 않는 내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 좋은 중재자가 되고 싶었다.


애나는 책에서 크리스티나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그리고 이렇게 크리스티나에 대해 에세이든 유튜브에든 언급하면 할수록 슬픔의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확인을 해보니 변기 물이 잘 내려갔다. 애나를 읽으면서 내 강렬했던 고등학교 추억을 인터넷에 처음으로 정리해 보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번역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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