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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l 03. 2022

기억

기억 사물함

의욕이 없는 사람이 혼자 있는 시간까지 좋아한다. 의욕이 없으니까 사람들이랑 부대끼는 것도 싫은 게 당연한 건가. 혼자 있다가 일주일에 두 번 학원 일을 하고 오면 기분 전환이 된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세상에 태어나 값어치를 해서일까. 하지만 주 5일 사람 부딪히는 일은 피하고 싶다. 그게 나다.


삼십 대 초반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자처하다 보니 혼자 있기에도 점점 노하우가 붙었다. 혼자 있다 보면 생활이 단조로워지기 쉬운데 그건 또 못 참는다.


혼자서도 잘 지내는 법은 뭘까. 요즘은 이직 공부가 한창이다. 지난 3월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3월은 공부법을 헤매서 슬럼프가 왔었다면 6월에 찾아온 슬럼프엔 이유가 없다. 핸드폰을 끄고 공부를 하는 편인데 한 2주 동안은 공부하는 중간중간 쓸데없는 유튜브를 열심히 봤다. 그 시간에 구독해 둔 클래스 101이라든가 브런치 글을 쓰면 훌륭한 딴짓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효율을 따지기 싫을 정도로 순도 100% 딴짓이 정말 하고 싶었나 보다. 지금은 제정신을 차렸다.


동기부여가 돼야 공부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데 약발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동기부여도 그때그때 바꿔줘야 한다. 딴생각 안 하고 공부할 때마다 나에게 칭찬스티커도 줬고, 공부 브이로그도 보고, 기상하면 무조건 카페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럼에도 모든 약발이 떨어져 버렸다.


얼마 전 종영된 <나의 해방 일지>세 남매 이야기에서 많은 점들이 공감됐다. 경기도 산포에 사는 세 남매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처럼 삶에 의욕 없는 세 남매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데, 표정만 봐도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았다. 남매가 터덜 터덜 걷는 모습에서도 공감이 됐다. 첫째 기정은 남자와 이렇다 할 연애도 못 해 본 채 나이만 먹었다. 덕분에 매사 신경질은 덤이다. 둘째 창희는 하는 일마다 안 풀리는 걸 자신이 수중에 돈이 없는 탓이라 한탄한다. 셋째 미정이는 남들이 보기에 큰 불만 없이 수더분한 척 사회의 일원으로 단정하게 살아낸다. 하지만 그 속이 시커멓개 타들어 가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셋째 미정은 수명이 도합 80이라면 8년으로 압축해서 빨리 죽어버렸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삶에 의욕이 크게 없다. 하지만 태어난 이상 최대한 단정히 살아내어 최소한의 나의 몫은 해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미정과 동료직원이 회사 근처를 걸을 때, 미정이 동료에게 이 더위를 기억해 뒀다가 겨울에 꺼내 쓰자 말한다.


우리는 이불 킥이라는 신조어를 국어사전에 등재시킬 만큼  수치스러운 기억을 수차례 떠올리지만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야박하다. 왜 그럴까?


미정의 대사가 시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기억을 자주 꺼내 보게 됐다. 아침공부를 시작할 즘 카누 커피를 타면 집 안에 커피 냄새가 풍긴다. 카누 커피 향을 시작으로 공항 내부 높은 천장에서 오는 하울링, 비행기 타기 전 설레는 마음, 창 밖으로 보이는 끝없는 하늘이 소환되고 그렇게 아침이 공항에서 시작된다.


하루 일과 뒤 샤워를 하고 침대에 앉아 있으면 10년 된 기억이 찾아온다. 유스 호스텔 6인실 빈 방에 온전히 혼자가 된 나를 마주했던 내가 된다. 학기를 마치고 남동생을 보러 유스호스텔에 잠깐 숙박했는데 깜깜한 방 노란 전등 하나가 학기 중에 수고한 나를 위로하는 기분이었다. 샴푸 냄새와 노란 전등 하나가 켜지면 그 시절 기억이 찾아오고 고요한 정막이 모든 것을 다독여 준다.


자기 인생을 비마이너스라고 할 정도로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기억을 이따금씩 쌓아둔 내가 대견하다.


공부 중에 좋은 기억 소환하기 약발은 곧 떨어졌지만 내 생활 속에 여전히 좋은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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