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 Apr 24. 2022

연애

연애를 위한 체크리스트.

브런치 작가의 서랍(브런치 작가가 글을 발행하기 전 임시 저장하는 폴더)에 지난 연애에 대한 욕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은 역시 아무리 다듬으려 해도 모난 데 투성이다. 원하는 글이 나오지 않아 지우고 지우다 보니 새로운 창에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동네 떡볶이 돈가스가 일품이라 포장 주문을 하러 엄마와 밖에 나왔다. 꽃을 좋아하는 엄마가 활짝 핀 꽃들을 감상하고 싶은지 집에 잘 안 오는 딸이랑 걷는 게 좋은지 느릿느릿 걸었고 나도 엄마의 속도에 맞춰서 걸었다.


집 뒤편 먹자골목에 십 년 넘게 있던 미용실이 사라지고 카페 체인점이 생겼다. 여기에 처음 이사 왔을 때가 고등학생이었는데 터줏대감 같았던 미용실이 사라지니 뭔가 헛헛하다. 둘이 걷기 시작하면 언제나 귀여운 조카들 이야기를 시작으로 결혼 이야기가 나온다. 엄마는 세 자식 중 결혼 안 한 딸이 누굴 만났으면 싶다가도 은퇴하고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 기분은 아랑곳 않고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는 아빠가 생각나서 혼자 살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새로 산 청바지를 입어보는 엄마에게 여태 내가 만난 최악의 남자들에 대해 생생하게 쓴 네 가지 공통점을 말해줬다. 엄마는 브런치에만 올리지 말라며 별말 없이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네 가지 항목 중 애석하게도 세 가지에 아빠가 해당됐다. 해당되지 않은 항목은 ‘모자지간’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빠가 다섯 살에 친할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조건 자체가 해당되지 않았지만 살아계셨으면 또 모를 일이다.


아빠와 엄마는 어렸을 때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에게 지원도 기본적인 의식주도 제대로 받지 못해선지 자식에게 아낌없는 지원이 곧 사랑인 줄 아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엔 돈이고 나발이고 엄마 아빠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나이지 않은가.


지원은 많이 받았지만 조용한 성격이기까지 했던 나는 거의 투명인간처럼 성장했다. 처음으로 용기 내어 엄마에게 그동안 집에서 외로웠다고 말한 나에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조용히 혼자 할 일을 하길래 그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줄 알았다며 내 지난 17년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공감능력’이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던 시기에 고딩인 나는 두 분의 ‘감정상태’가 비슷한 수준이라는 걸 처음으로 엿볼 수 있었다. 하긴 이 각박한 세상, 공감능력 지수가 지나치게 높으면 살기 팍팍하다. 요새는 밥을 먹다가 기회가 생기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꺼낼 때마다 묘한 긴장감마저 도는데, 변태처럼 꽤 이 기류를 즐기기도 한다. 내 어린 시절처럼 은퇴 이후 자식들에게 관심을 갈구하는 부모님은 고개를 떨구며 아빠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엄마는 긴장해선지 말을 더듬는다. 어쨌든 난 공허함을 미술로 풀고, 남동생은 종교, 언니는 친구들을 만났다.


지금은 이 각박한 세상에 부모의 지원만큼 큰 사랑은 없는 것 같아 감사함밖엔 없다.


없이 살아봐서 없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아신다는 두 분은 지금도 지원이 필요한 가정의 학생들에게 장학금(그냥 동사무소에 무작정 가서 생활이 힘든 학생들 지원하고 싶다고 했던 아빠와 매달 가까운 이웃을 위해 헌 옷이나 돈을 지원하는 엄마)을 주고 재단에도 아낌없는 기부를 하신다. 자식들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부모의 책임을 다할뿐더러 다른 자녀들까지 챙기는 두 분이 내심 자랑스럽지만 나는 내 어린 시절이 잊히지 않아서 이따금씩 공허함이 밀려온다. 어쨌든, 한 달에 한 번은 부모님을 찾아뵌다. 이레나 저레나 내 마음의 고향이니까.


좋은 애인, 좋은 연인은 어디 있을까.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이효리 언니는 남편이 나에게나 좋은 남자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남자가 아닐 거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쁜 남자 공통점을 공책에 써 내려갔듯 나에게 좋은 남자를 상상해 보며 리스트를 죽 적어 내려갔다.


1. 본인이 하는 일에 진지하기.

: 직업이나 취미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 나이가 들수록 허무해지기 쉬운데 그런 삶에 몰두할 일이 없다면 365일 술이나 게임에 중독되기 쉬운 것 같다. 술이나 게임도 적당히 하면 삶에 보탬이 되지만 절제가 안 되는 순간 주위 사람이 고통받는다.


2. 긍정적인 사람

: 쾌활하고 사교적이다라는 개념이 아니다. 표면적인 성향과는 별개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따라오는 사람이 헤매지 않도록 알려주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3. 공감

: 상대방의 이야기에 내가 애를 써서 공감하고 있거나 상대방이 내 말에 일부러 공감하는 척한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서로 지치는 일이 된다. 그런데 연애를 떠나 진심으로 맞장구치는 관계가 몇이나 될까. 적어도 웃는 포인트나 분노 포인트가 같았으면 좋겠다.


4. 식습관이 비슷한 사람.

: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남들보단 많을 텐데 식습관이 안 맞으면 그것만큼 괴로운 건 없는 것 같다. 상대에게 맞춰주다가 장염까지 온 적이 있어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6. 서로에게 1순위가 되는 사람.

: 가정을 꾸린 언니와 남동생만 봐도 더 이상 내 동생 내 언니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분가한 동생, 분가한 언니다. 언니가 형부를 만나고 동생이 올케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감정인데 나는 그때부터 마음으로 언니랑 동생을 보낼 준비를 한 것 같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최악의 연애는 1-6번이 다 안 맞았다. 정말 최악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당시에 나를 생각해 보면 나도 1번이 부족했다. 일에 책임은 다 했지만 몰두하지 못했다.


다음 마지막 연애는 3번 4번 6번이 안 맞았다. 이 당시에도 역시 나는 1번이 부족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교제를 시작할 때 기준과 조건을 갖고 시작하지 않았다. 서로 책 읽는 걸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교제를 시작하거나 만날 때마다 나를 좋아하는 작은 행동들을 보고 핑크빛 연애를 시작했다.


1번의 공허함을 상대의 어떤 부분으로 채우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과한 행동이든 감정으로  나를 꾸역꾸역 채우려 했을지도 모른다.


요새는 파트타임을 하며 이직 준비, 연말 일러스트 페어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쁘고 정신없지만 내가 가는 길이 편안하다. 언젠가 1-6번이 충족되는 사람과 연애를 할 거다. 


글에 모난 데가 사라져서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