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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25. 2017

일상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 영화.

<더 테이블> 2016.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 당신 꿈의 영상의 추억의 대상들을 이용하십시오. 당신의 생활이 비록 빈약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탓하지 말고 평범한 생활이 갖는 풍요로움을 끌어낼 수 있는 시인이 못 되는 자신을 탓하십시오. 너털너털 걸어가는 하굣길의 초등학생, 지난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창가에 차오르는 빗방울. 김종관 감독님의 <더 테이블>은 차디찬 초봄의 한 카페, 한 테이블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녀간 네 번의 손님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Omnibus) 영화다. 인물들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관객이 대화에 담긴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추측하게 만든다. 감독은 영화의 시간적 흐름을 암시하기 위해, 사물에 비치는 빛을 묘사하는데, 무엇하나 극적일 것도 없는 평범한 소재들을  감독의 애정 어린 관찰을 통하여, 평범하지 않게 만든다. 김종관 감독님은 자신을 탓할 일이 없는 시인이다.


출처. <더 테이블>


첫 번째 만남, 하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사뭇 긴장된 얼굴로 카페에 등장한다. 낯선 공간으로부터, 친밀함을 원하듯, 카페의 이곳저곳에 시선을 둔다. 곧이어,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등장한다. 회사 업무 중간에 나온 남자는 긴장한 듯 맥주를 주문하고, 마스크를 벗고 남자를 마주한 여자는 수줍게 커피를 시킨다. 여자는 대화를 시작하며, 남자와의 오래된 추억을 꺼내어 보려 하지만, 남자는 대뜸, 무례하고 의미 없는 질문을 계속한다. 지치는 대화는 계속되고, 여자는 추억을 추억으로 남기지 못했던 자신을 꾸짖듯 서둘러 테이블을 떠난다. 남자는 여배우가 되어 성공한 옛 연인이 마냥 신기했기에, 궁금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나 또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무례한 질문을 종종 받은 기억이 있다. 추상화는 나도 발로 그리겠다. 미술 하시면, 고흐의 해바라기 그런 거죠? 등. 극 중 여자의 기분은 나처럼 그렇게 떫었을까. 낭설과 편견이 이해가 되면서도 예의까지 지켜주지 못한 남자의 태도는 나까지,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들 앞에서 확고하고 침착한 태도를 가지십시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출처. <더 테이블>

두 번째 만남,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볼멘소리로 일관하고 남자는 생글생글한 얼굴로, 오랜만에 본 여자가 마냥 좋아 말이 많아진다. “얼마나 떠나 있었죠?” “ 4 달이요. 아니.. 5 달이었던가..?” 여자는 짐짓 모른 척 물어본다.  회사에서 잘리고 여행을 다녀온 남자. 꿈을 위해, 어렵게 회사를 이직한 여자. “회사에서 잘리면 생각이 많아지잖아요.” "제가 뭐라고 연락을 해요." 둘의 대화는 공영방송에서 지난 7월 종영된 <쌈 마이웨이 >에서 "꿈꾸지 마. 꿈꾸면, 지질해진다."는 주인공의 말을 여과 없이, 떠올리게 한다. 물에 휩쓸려가듯 사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발. 남루해진 자존감을 뒤로하고 사라졌던 용기를 다시 꺼내어, 두 남녀는 서로에게 떨리는 사랑을 고백한다.  


출처. <더  테이블 >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 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끌어 가는 용기입니다. -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출처. <더 테이블>


세 번째 만남, 사기결혼 전적이 있던 젊은 여자는 다시 한번 결혼을 준비한다. 가짜 엄마 역할을 위해 섭외한 나이 든 여자와 커피를 마신다. 나이 든 여자는 어쩐지, 끊기는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가려고 하고, 젊은 여자는 계속해서 최소한 정보만을 이야기하며, 사무적인 대화를 이끈다. 나이 든 여자는 회한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눈으로 젊은 여자를 바라본다. 기나긴 침묵. 나이 든 여자는 젊은 여자가 알려준 별명을 자신에게 하듯, 젊은 여자에게 하듯, 말을 지어 본다. “우리 얘가, 게으른 건 아닌데, 행동이 느려요. 느림보 거북이처럼.” 젊은 여자는 형식적인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그 중간에서 갈팡질팡을 하다, 어렵게 “잘하셨어요” 한마디를 내뱉는다. 느림보 거북이. 나는 단순한 것을 어렵게 보는 경향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질문도 많았고, 일을 항상 벌려놓기 일쑤였다. 개인마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몰랐었던 나는 내 속도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인지, 나이 든 여배우님의 대사는 나의 지난한 시간들을 상기시켜줬고, 그분의 침묵과 눈빛 속에 깊이 위안을 받았다. 


선생님은 무언가를 납득하는데 보통사람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리는 유형 같아요. 하지만 길게 보면 시간은 선생님 편이 될 겁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출처. <더 테이블>


네 번째 만남, 날은 어둑해지고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공기가 만나는 초봄의 카페 창문에 빗방울이 차오른다. 홍차는 다홍빛으로 우려 지고 우산 꼭지 밑으로 빗방울이 바닥으로 똑 똑 떨어진다. 생각이 많은 남자의 눈은 창밖 가까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에게 멈춘다. 싱긋 웃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담배와 카페의 따뜻한 공기에 다시 술기운이 도는 듯, 홍조 된 볼을 비비고 차를 주문한다. “운철 씨, 마음 가는 길하고 사람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틀리지” “직장이 혜경 씨보다 더 무섭더라." 남자와 여자는 헤어진 연인이다. 여자는 남자를 못 잊고 매달리는 건지, 달라지는 건 없으면서, 그냥 한번, 매달려보는 건진 알 수가 없다. 남자는 여자를 잡고 싶은 건지, 인연이 아님을 알기에 여자를 보내려 하는 것인지 역시 가늠할 수가 없다. 네 번째 만남에서는, 앞의 세 번의 만남보다 추측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여지는 풀리지 않는 생각의 매듭처럼 지금도 두 남녀는 왜 그랬을까를 종종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어른의 사랑이란.


<더 테이블> 시사회가 끝나고 며칠 뒤에 비가 내렸다. 한걸음 땔 때, 혜경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생각나고, 또 한걸음 걸을 때, 홍차가 우려 졌다. 내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운철의 우산에 맺힌 빗방울처럼 같은 속도로 떨어졌다. 비가 그친 뒤 바라보는 젖은 땅에서, 풍기는 흙냄새가 차가운 바람과 함께 코끝을 스치자, 감독의 시선들로 묘사된 일상들은 내 일상에 들어와 내 모든 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 윗글은 브런치에서 주관하는 <무비 패스>를 이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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