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련 대가리 거무죽죽하듯 사랑이 지고

쫌쫌따리 생산일지: the beginning

by 정우안



아이 생산 전엔 모른다. 조심하여라 너는 곱고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노랫말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머리로 안다 생각했다. 그러나 삶의 곡절 대부분이 그러하듯 듣고 읽어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는 얼마나 큰 간격이 있던가. 그 간극 만큼 슬픔과 서러움과 절망이 채우고 그 아래로 잠기거나 위로 떠올라 기어나오거나 그건 당사자의 몫이다. 큰 간극 사이에 훌렁 빠져 슬픔과 서러움과 절망의 즙을 짜내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리는 줄로만 알았던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바닥에 툭 떨어진 목련 대가리 거무죽죽하듯 사랑이 지고 사회적 사망선고가 내려지다.

자기연민 가득한 문장에 아이 존재에 관한 암시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보세요. 세상엔 출산 후에도 자기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제 어디가 문제 있는 줄 알고 조용히 있는 겁니다.


화사한 사랑이 바닥에 떨어져 검게 죽처럼 짓이겨진 목련 대가리가 되는 과정은 몹시 구태의연하다. 임신과 출산, 그 직후까지 사랑은 제법 오래 견딘다-는 개뿔. 복선은 언제나 존재한다. 연애 때, 신혼 때, 심지어 임신했을 때. 복선은 존재하나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렇듯 복선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복선을 알아차리는 이는 대개 이야기에서 빠르게 퇴장, 즉 죽음을 맞거나 이야기 자체가 재미 없어져 관심을 놓친다. 여려분. 나는 복선 여러 개를 알아차렸지만 애써 혹은 기꺼이 무시했습니다. 사랑은 화사했고 일은 같잖았고, 사회적 제도와 함께 나는 멍청한 선택을 내렸기에 물러설 곳이 마땅찮았기 때문입니다.


검은 목련 대가리가 되는 과정을 실재로 관찰한 적 있다. 하얗게 만개한 목련은 푸른 잎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에 놀랍게도 밝고 아름답다. 그리고 갑자기 뚝 대가리부터 꺾여 떨어진다. 한 잎 한 잎 떨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목련은 어느날 갑자기 바닥에 철퍼덕 하얗게 추락한다. 그리고 그 위를 누군가 걷고 잎은 짙이겨진다. 당연한 과정이다. 내 사랑이 그랬다. 언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날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사랑한 사람의 가족이, 나 자신이 떨어진 사랑 위를 걷고 또 걷는다. 육아가 길어질수록, 특히 1년 가까이 되어갈수록 사랑은 형체를 잃는다. 수면부족, 피로, 지리멸렬한 집안일, 단순반복 돌봄 노동, 감정의 억눌림, 소통 불가. 이런 것들 앞에선 성인-saint-도 눈을 질끈 감는다.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끝이 없는 힘듦과 아픔의 데칼코마니로 사랑은 형체가 상실된다.

사회적 사망선고에 관해 말해볼까. 화사한 사랑을 맞아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젊은 멍청이를 기억하나요. 그게 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길러졌다. 공부하고 대학가고 취업하라는 말에 내재된 명령이다. 태어날 때부터 너는 애를 낳고 기르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 말한 사람은 없다. 교묘하게 ‘결혼해야지’라는 말에 의뭉스럽게 눙쳐서 녹여둘 뿐. 나는 미처 그 숨은 뜻을 몰랐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취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회적으로 세팅된 내 자아는 휴직하고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본성에 벗어나기 시작한 거다. 이건 사회적 자살이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사회적 사망선고는 아이를 낳고 기르고 사랑이 바닥에 철퍼덕 떨어지고 나니 내려졌다. 내게 연결된 대인 관계의 끈은 거의 존재치 않았다. 물론 친구와 지인은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상황을 말하고, 내 불안정한 상태에 달려와 말동무가 되어줄 사람은 없었다. 내 친구와 지인은 모두 일했다. 당연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는 없었냐고? 그런 친구와는 멀어져 1년에 한 번 연락하는 정도였으니 더더욱 연락 불가한 사람이다. -그러고보니 그 친구도 내가 겪은 순간을 겪었겠군-


사회적 사망선고는 사회적 자본, 인간관계가 무너졌을 때 내려진다. 어릴 때 부모와 싸우고 가출한 적 있는가. 가출하는 이유는 그 집이 자신을 옥죄기 때문이다. 아기를 키우고 사회적 사망선고가 내려진 사람은 나를 옥죄는 가족, 집, 의무에 옴싹달싹할 수 없이 얽매여 달아나지도 못하고 하루를 또 하루를 침잠하게 된다. 부부싸움 후에 상대는 일터에 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나는 우리가 싸웠던 바로 그 집에 남아 아기를 돌볼 때 느끼는 무력감과 참담함은 겪은 자만이 알 수 있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도 힘들다고 말할 참인가. 상사가 ‘너 직장 생활 앞으로 힘들게 만들어줄까?’ 라고 면전에서 말하고 난 다음 날 웃으면서 그 상사와 얼굴을 부대껴야 하는 상황 정도가 되어야 집에 남아 아기를 돌보는 사람의 심정에 비할 수 있다. 믿어라. 난 둘 다 겪어봤다.


여기가 처음. 싸움. 절망. 화해. 싸움, 절망. 화해. 도돌이표. 처음으로 돌아가시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백만 번 반복할 필요도 없이 몇 번 반복하면 변수가 생긴다. 나는 병이 생겼다. 여러분. 질병은 말입니다. 고칠 수만 있다면 내 주변의 옥석을 가려줍니다. 내가 지옥에서 어떻게 기어 돌아왔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세한 건 다음 편에 적겠지만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내가 아프면 주변 모든 사람과 상황이 명료하게 나뉩니다. 그지 발싸개 같은 것과 가치 있는 것. 나는 그걸 알아차렸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