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쫌따리 생산일지: the beginning
이 이야기의 절정을 프롤로그에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죽어 지옥을 헤매다 악착같이 기어 나온다.
고민이다. 힘든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각색된다. 과장과 윤색의 문법으로. 고통과 인내, 외로움과 분노, 감정들은 성취를 위한 필수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다면 얼마나 힘들었는지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야기에서 고구마는 내던지고 사이다만 취하고 싶은 요즘 같은 세상에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나와 유사한 고통에 빠진 이는 이 각색된 이야기를 읽고 무슨 생각을 할까. 야 너두 할 수 있어? 나였으면 그 말하는 사람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일기장을 뒤적거리고 이런저런 문장을 쓰다가 나혜석의 고백을 읽는 데까지 흘러갔다. 너무 갔나. 나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구구절절한 이 고통의 기록은 이야기의 절정이 되어야 하며 기록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나혜석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감히’ 공적인 글쓰기로 드러냈고 그로 인해 삶은 뿌리에서부터 흔들렸다. 그의 글쓰기는 사회적 자살 기도이며 자기 파괴적인 행위였나. 아니다. 이제는 단호히 말할 수 있다. 남편이 허허실실 밖에서 호인으로 통하고 기억될 뻔할 때 나혜석은 이혼 고백서로 남편의 민낯을 보였다. 여자는 죄다 조신하게 결혼하고 애 낳고 남편 내조하며 살았을 거라 납작한 사고를 하는 이에게 웃기지 말라며 모된 감상기를 적었다. 적지 않고는 못 견뎠을 것이다. 그 글들은 토해내듯 적힌 것이다. 토하듯 적은 글은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한 세기가 지나도 그 위력은 줄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한다. 내게만 구구절절하고 타인에게 구질구질할지라도 적어 남겨야지. 무엇보다 내보여야지. 그리하여 시간이 흐른 후 나만의 고통, 절망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도록, 열 명 중 아홉이 구질구질하다 여겨도 한 명이 읽고 주먹을 쥐고 고개를 들 힘을 얻는다면. 해야지.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죽어 지옥을 헤매던 시기의 영상과 일기를 다시 읽었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아이와 내가 인생 네 컷을 찍는 과정을 기록한 8초가량의 영상이다. 웃는 우리를 들여다보면 감정을 다시 경험한다. 망각을 견딘 짙은 감정 하나가 시간을 넘어 역습한다. 감정의 이름은 외로움이다. 고독과 다른 지독한 외로움으로 나는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8초의 영상이 끝나고 핸드폰 화면이 점멸하자 울 것 같은 내 얼굴이 반사된다. 외로움은 심장에 쌓인다. 은유가 아니다. 실제적 경험으로 묘사하는 사실이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심장에 쌓여 심장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옥죄여 소위 ‘가슴이 갑갑하다’라는 표현에 걸맞은 통증으로 체험된다. 외로움은 술과 담배보다 유해하다. 외롭지 않으려 결혼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지옥행은 홀로 티켓팅하지 않았다. 한 명이 더 있다. 지옥행의 동반자. 나의 배우자. 나의 지난 사랑. 나의 병의 원인.
나는 가만히 앉아 지금 이 순간 내가 그에 관해 바라는 바를 생각한다. 나는 나의 배우자이자 지난 사랑인 그가 더 이상 내게 의미 없이 배경처럼 흐려지길 원한다. 나의 우선순위와 감정, 배려, 공감을 더 바르고 생산적인 곳으로 옮겨둔다. 옮기는 작업은 대기시간만 길었지 실제 작업 시간은 찰나다. 목련 대가리가 땅에 철퍼덕 떨어지듯 한 순간에 이뤄지는 거다. 너는 그곳에 남아 있으라. 나는 흘러가겠다. 누군가 말하길 사람은 딱 제가 가진 심리적 트라우마의 수준만큼의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그리고 한쪽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성숙하면 다른 한쪽을 떠난다고. 더 이상 같은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의 축을 세워 미래 어느 시점에 그도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할지도 모르지. 그가 보기에 무심한 나의 행동으로 외로움이 심장에 쌓이면 나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 스스로 구원해 낼지도. 그러나 그건 그의 이야기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 지고 지옥에서 기어 돌아오자 모든 것은 명확하고 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지저분하며 불공평하다. 그게 삶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불공평하다.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의 명문처럼 ‘So it goes’, 뭐 그런 거지를 말하며 어깨를 으쓱일 밖에. 비관도 냉소도 아닌 있는 그대로 거지 같은 세상에 어깨를 으쓱이고, 전처럼 화사한 사랑이다 헛소릴 지껄이지는 않게 된 것. 그게 지옥 관광의 성과다.
쫌쫌따리 생산일지에서 디테일이 필요한 부분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후다. 지옥에서 기어 나와 방향을 잡아 걸어 나가는 일상의 세부내용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쓰임이 있다. 내가 그러했다. 삶을 되찾은 여성의 시시콜콜한 에세이 읽기를 그래서 사랑한다. 이 이야기의 결말, 그건 알려줄 수 없다. 아직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나는 디테일을 갖추고 쫌쫌따리 생산일지를 작성할 작정이다. 신비주의자 루미(Rumi)의 시에 내가 사랑하는 구절이 있다.
잘함과 잘못함의 개념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 당신을 만나겠다.
화사한 사랑이 목련 대가리 떨어지듯 지고, 떨어진 지옥의 길목에서 돌아오면 모든 노래와 시의 ‘당신’은 의미가 달라진다. 더 이상 나의 삶을 기적적으로 구원할 어떤 이성이 아니라 내가 된다. 그동안 묻어두고 버려두고 외면하고 침묵시킨 ‘나‘.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구절의 시에 등장하는 들판에서 만나는 당신은 나다.
이제부터는 푸른 들판 너머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나를 만나러 가는 여정을 적을 작정이다. 여정은 지루하고 의미 없고 답보하며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의 연속일 것이나 중요한 건 나는 어디론가 간다는 사실이다. 가자. 들판으로.